인물

1980년대

이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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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민중의 순박함을 사랑하며 참세상을 꿈꾸던 노동운동가 이형락

 

 

이형락 열사는 1931년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한의원을 운영하던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약을 잘못 처방한 바람에 사람이 상해를 입었다는 말을 듣자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부친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전 가산을 털어 내놓은 후 운명한 뒤, 열사는 맏형 아래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사회주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이후, 맏형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에 15세의 나이에 서울로 상경한 열사는 스스로 학비를 벌며 중학교 생활을 하다 민주학생연맹 활동으로 빌미를 잡혀 1950년 3월 1일 체포되었다. 그러나 세 달 후, 북한군의 침공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형락 열사는 탈옥하였고 남로당 종로구 당원과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56년, 이형락 열사는 서울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씨를 만나 결혼하여 슬하에 다섯 딸을 두었다. 가정을 이룬 뒤에도 이형락 열사는 사회운동에 투신하였고, 대한노총의 전국노협 결성에 참여하고 4.19 혁명 발발 이후 대구에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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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중심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형락 열사는 1964년에 발생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인해 초등학생이던 큰 딸을 데리고 몇달간 피신을 다니다가, 1968년에 통일혁명당 관련으로 연루되어 피검되었다. 한 달간 연이어 이어진 모진 고문과 매질, 그리고 협박을 토대로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단체를 정권이 거짓으로 꾸며내었고 이형락 열사 또한 남조선해방전략당에 연루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 재심에서 사형이 아닌 징역형으로 형벌이 낮춰지기는 하였으나, 이형락 열사는 교도소에 갇혀 10년 동안이나 어린 딸들과 사별해야만 했다.

 

1978년 9월 6일, 이형락 열사는 만기출소 하였으나 보안관찰 대상이 되어 전두환의 쿠데타와 대구미문화원 폭파사건때 안기부로 잡혀들어가 며칠씩 협박성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인해 심각한 증세를 겪은데다 가정의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진 열사는 결국 1985년 6월 24일, 쉰 다섯이라는 나이에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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