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90년대

김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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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민운동가 김영자

 

 

김영자 열사는 농촌운동에 평생을 이바지한 농민운동가이다.

1944년 3월 2일 충청남도에서 태어난 김영자 열사는 196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정읍농림고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였다.

1969년 3월, 김영자 열사는 고된 농사환경 속에서 고생하는 여성 농민의 권익을 향상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 시설원예 농사를 시작했다.

김영자 열사는 비닐하우스에서 예비 농업인들의 실습터를 제공했고 농업 기술을 지도하며 아낌없이 헌신하였다.

이후 1975년에는 지역탁아소인 윈터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어머니 자치활동을 통해 귀감이 되었다.

1977년에는 이런 경험을 통해 가톨릭농촌여성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김영자 열사는 성남에서 지역운동을 지도했고 각종 연합단체의 공동대표가 되어 1980년에는 민주화운동을 지도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1986년에는 성남민주화운동연합 여성분과 위원장을 역임하고, 1989년에는 전국여성농민회 경기도 총무를 역임한 김영자 열사는, 노태우 정권 치하에서 자신의 남편 김준기 선생이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김영자 열사는 1990년 성남 큰우리 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농촌운동과 생협운동에 이바지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펼쳤다.

김영자 열사는 1993년 3월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다 49세의 나이로 1993년 9월 11일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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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농여회는 ’85년 가톨릭여성농민회로 성장하였고 동지는 다시 회장을 맡아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후 동지는 성남에서 지역운동을 지도하여 각종 연합단체의 공동대표로, ’80년 민주화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후 전국여성농민회 경기도 총무를 역임하였다. 노태우군사정권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남편이자 동지인 김준기 선생의 뒷바라지와 자녀교육 등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90년 성남 ‘큰우리 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농촌운동과 생협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93년 동지는 갑작스런 위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93년 9월 11일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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