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10년대 이후

남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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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혁명가 남궁원

 

1966년 출생의 남궁원 열사는 1987년 관동대학교에 입학해 곧장 사회운동에 투신할 정도로 행동력과 정신이 남달랐다.

남궁원 열사가 노동자 정치운동과 코뮤니스트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91년 민중회의와 민중정치연합 등지에서 활동한 때부터였다.

이 뒤로 남궁원 열사는 항상 핍박받아왔던 99%의 노동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대한민국 사회의 단 1%만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2001년 2월에는 32년만의 대폭설이 내렸다. 

30대의 남궁원 열사에게 있어서도 2001년 2월은 유독 추운 겨울이었다. 

그 해 겨울에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잊을 수 없는 혹독한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IMF 사태 발생 이후 대우그룹은 4년간 계속해서 경제적 파탄만을 맞이해 채무조정 대상이 되었다.

모기업이 위기에 빠진 대우자동차 회사는 김대중 정부와 함께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 동의를 강요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IMF 사태가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6.25 전쟁 이후 여지껏 겪어보지 못했던 고용불안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이 구조조정에 들어간다면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이 뻔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사실상 노동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업의 돈이 부족해질때마다 재무지표 앞에 제일 먼저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은 노동자의 권리였다.

대우그룹이 위기를 겪기 시작한 이후 대우자동차 측 노동자들은 강제로 근무도 못하고 임금까지 체불당하는 사태까지 겪었다.

절반에 가까운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은 일이 없는 날 일용직 노동자로 근무했고 1년 사이에 맞벌이 노동자 가정은 3배 이상이나 늘어났다.

정부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노조 간부들을 연행하는 등 계속해서 탄압을 개시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결국 대우자동차 측은 구조조정을 강행했고 무려 1,750명이나 되는 노동자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이에 반발한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은 공장을 점거했고 정부는 노동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 강경진압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투쟁하기로 결정했으며 남궁원 열사 역시 현장에 있었다.

경찰은 계속해서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남궁원 열사 또한 투옥되고 말았다.

구속에서 풀려난 뒤인 2002년부터 남궁원 열사는 정부의 탄압을 생생히 겪었지만 여전히 노동자를 위한 사회에 대한 희망을 져버리지 않았다.

사회주의정치연합과 노동자평의회를 향한 서울회의 활동을 이어나가던 남궁원 열사는 2007년 다시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남궁원 열사는 법정에서 선처를 바라는 대신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외쳤다. 

남궁원 열사는 자신의 공산주의 활동이 인류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동계층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국가보안법이 단지 국가의 1%만을 위해 만들어진 악법이라 주장하였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 이후 남궁원 열사는 자신이 2005년부터 맡았던 공산주의 출판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2013년 4월 14일 남궁원 열사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결국 47세의 나이로 7월 4일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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