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70년대

권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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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일열사 권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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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혁 열사는 진보적 경제학자로써 유신정권 하에서 노동운동 및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배우 권재희 씨의 사형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1952년 함양 산청에서 태어난 권재혁 열사는 서울대학교 졸업 후 미국 유학으로 유학을 떠나 몬태나 주립대학과 오리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수여받았으며, 당시 작성한 경제학 논문이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촉망받던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고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권재혁 열사는 미국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을 결심한다.

 

육군사관학교와 건국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한 권재혁 열사는 영향력 있는 진보 경제학자로써 활동한다. 민족화합운동연합의 전 상임고문 고 김병권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권재혁 열사는 민주화 운동의 확실한 리더였다고 한다. 5.16 쿠데타 직후, 권재혁 열사는 '민주사회동지회'에서 미국 경제와 후진국 개발을 주제로 한 경제 강연을 발표하고, 노동운동가 이일재 선생과 함께 활동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권재혁 열사가 활동하던 와중인 1967년, 박정희는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다.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3선 개헌을 실시해야 했고, 3선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했다.

 

625 전쟁을 겪은 세대가, 사회의 핵심 구성원이었으며, 베트남 전쟁 발발로 인해 국군이 파병되고, 김신조 사건과 같은 북한무장간첩 습격사건이 사회를 떠들석하게한 당시 대한민국은 매우 강력한 반공주의적 여론이 지배적인 환경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앙정보부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반공여론을 자극하기를 꾀했으며, 그 결과 권재혁과 이일재를 비롯한 진보 지식인 13명을 강제연행한다. 강제연행 당한 13명의 지식인들에게는 53일간의 불법 구금과 고문 및 조사가 자행되었으며, 중앙정보부는 1968년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사건을 발표한다. 막대한 공작금을 지원받은 지하간첩단인 통일혁명단과 깊게 연루된 권재혁과 이일재 등의 인물들은 하부조직인 남조선해방전략당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권재혁은 이 사건의 주모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권재혁 열사는 법원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였으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나서야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고, 중정의 발표와는 다르게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사실도 없으며 북한공작금을 받은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항소는 사형 판결을 뒤집지 못했고, 같은 해 11월 4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권재혁 열사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권재혁 열사의 유가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을 찍힌 채로 주변의 멸시를 받으며 살아갔다.  권재혁 열사의 유가족들에게 유품은 남겨지지 않았다. 논문이나 필기구 등의 유품을 중앙정보부 측에서 미리 소멸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권재혁 열사의 유가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권재혁 열사는 평소 화를 낸 적이 한번도 없을 만큼 인품이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을 발표하며,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철통같은 방위 태세에 있다는 것을 김일성이 알도록 했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표출했다. 그러나 2009년,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조사를 통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간첩조작사건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2014년 권재혁 열사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권재혁 열사의 사형이 집행된지 46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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