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전태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 열사는 1948년 8월 26일 대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너무나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을 못 먹는 일조차 약과에 불과하고,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할 정도였다. 16살의 나이에 서울로 상경하여 청계천 평화시장 내의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열사는 얼마 되지도 않아 재단사로 승진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 한명이 폐렴에 걸려 심하게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도와주려 했으나 오히려 해고당할까봐 이를 절대로 알리지 말아달라는 애원이 돌아오는 일이 발생했다. 며칠 뒤, 병에 걸린 여공은 해고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너무나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전태일 열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작 열두살밖에 되지 않는 소녀들이 하루 열 네시간동안 공장에서 노동에 시달리지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와 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자신의 동료가 먼지로 인해 폐병에 걸려 죽자, 사장이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은 채 "저거 치우고 빨리 일해라" 라고 발언하는 상황까지 겪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의 노동 환경은 너무나 처참했고 열사는 이를 어떻게든 타파해야겠다는 결심을 해 노동운동의 운명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간 전태일 열사와 그의 동료들은 근로기준법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법은 온갖 한자와 어려운 법률 용어로만 작성되어 있어 해설서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전태일 열사는 대학을 간 지인을 찾아가 한 페이지를 읽는데 하루를 전부 보낼 정도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대한민국의 법은 굉장히 선진적이었으며 근로기준법 또한 지금의 근로기준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같은 것이 있는줄도 모르고 일만 죽어라 한 자신들이 바보같았다는 의미에서 '바보회'라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을 창립했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의 노동운동은 봉제공장 사장들에게 밉보였고, 이 때문에 평화시장에서 해고된 열사는 한동안 공사장 잡역부로 일했다.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바꾸고, 청원과 진정보다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계획해 서명운동을 노동청에 제출해 경향신문에 보도되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러나 감사가 나왔을 때나 조심했을 뿐인 공장주들은 계속해서 횡포를 부렸으며 정부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사람다운 대우를 누리게 해주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에 전태일 열사는 삼동친목회를 소집해 1970년 10월 20일과 24일날 시위를 계획하지만 실패했다. 11월 13일에는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 법전을 불태우려 했으나 경찰과 구사대의 제지로 인해 실패했다. 자신의 모든 시도가 좌절되어 절망한 전태일 열사는 동화시장 계단에서 한참을 생각한 끝에 분신투쟁을 결심하였다.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열사는 결국 불을 질러 법전과 함께 자신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라고 외치며 산화하였다. 전태일 열사는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로 바닥에 쓰러졌고, 그렇게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불씨가 시작되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연명치료조차 거절당한 전태일 열사는 그날 밤 10시, 자신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내가 못 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뤄달라는 말을 남긴 채 2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재단 전태일재단 (chuntae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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