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김윤기
노동해방전사 김윤기
김윤기열사는 1964년 출생의 노동운동가이다.
김윤기 열사는 1983년 국민대학교에 입학해 동아리 청문회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80년대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불꽃이 제일 거세던 시기였고 김윤기 열사는 시대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했다.
그 중 6월 민주항쟁의 예고편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세게 불타올랐던 인천 5.3 민주항쟁에도 김윤기 열사는 참가했다.
1986년 2월, 제1야당으로 등극한 신한민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서명 운동을 개시하였다.
처음에는 신한민주당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나, 광주 대회에서는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대구 대회에서는 독자적 플래카드가 등장하고 별개의 민중대회가 열리는 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한민주당 총재가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 라는 발언을 하는 등 전두환 독재정권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에 분노한 재야 인사들과 운동권 세력이 이탈하여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86년 5월 3일, 재야인사들과 운동권 세력은 신한민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던 인천시민회관에 집결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지도부가 통일되지 않아 제대로 결집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에는 실패했다.
시위자들이 계속해서 이탈해 규모가 작아지자 경찰은 대대적인 강경 무력진압에 돌입했고, 수많은 부상자를 내며 319명을 연행해 129명을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김윤기 열사 또한 실형 1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도 김윤기 열사를 포함한 이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가혹한 고문과 폭력적 통제를 자행하는 교도소에 맞서 격렬한 단식투쟁과 소란을 일으켰으며 교도관들이 그 어떤 수감자들보다 제일 지긋지긋하게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만기출소한 김윤기 열사는 노동자로 살기로 결심한 뒤 1988년 7월, 성남시에 위치한 덕진양행에 입사한다.
당시 김윤기 열사를 고용한 회사 측에서는 노동자들을 소모품 취급하며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회사 측이 어째서 노동자들을 잘 대우해줘야 하는지 가르쳐주기 위해 김윤기 열사는 동료들과 의기투합하여 1988년 11월 29일 노동조합을 결성해 위원장에 선출된다.
그러나 회사 측에서는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으며 교섭을 계속해서 결렬시켰고, 공장장과 구사대는 조합원들을 폭행하며 노조에서 탈퇴하라는 압박을 주었다.
전기와 수도, 전화선을 끊고 조합원들을 업무방해와 퇴거불응으로 고소하는 등의 강경 대응에도 노동조합 측이 물러나지 않자 덕진양행 측에서는 노동자들과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초강경 대응을 결심한다.
공장을 아예 폐업시켜 버린 후 서울에 위치한 본사로 이전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대응은 성남 지역에서도 최초였으며, 공장이 폐업한다면 노동자 전부가 실업자 신세가 되어버릴 것이었다.
이로 인해 김윤기 열사는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1989년 2월부터 파업 농성을 시작하였고, 성남 지역의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투쟁을 실시했다.
1989년 4월 3일, 노조원 32명은 회사 측과 열번째 협상에 들어갔으나 결렬되었다.
노조 측에서는 30명을 계속해서 고용할 것을 요구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20명의 일자리만을 보전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윤기 열사는 분노하였고 결국 오전 11시경 4층 식당에서 자신의 몸에 연료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하였다.
김윤기 열사는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운명하고 말았으며 금촌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사른 김윤기 열사는 2015년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