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80년대

성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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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열사 성완희

 

 

성완희 열사는 1959년 6월 24일 충북 제천에서 성창락과 권영순의 3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불행스럽게도 두 살에 결핵으로 아버지를, 네 살에 열차사고로 어머니를 여의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작은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성완희 열사는 서울로 상경하여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던 곳인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봉제공장의 시다를 거친 성완희 열사는 편직기 기사로 살다 가내수공업 작업장을 운영했으나 폐업하고 파산을 겪은 뒤 실업자의 생활을 했다. 성완희 열사는 다시 성수동 마찌꼬바에서의 기사생활을 하다 건설업체 일용직 잡부 일로 생활을 이어나가고, 현장에서 산재 사고를 겪는 바람에 일을 할수 없게되자 고향 제천으로 돌아가 포장마차를 운영했는데 이 마저도 경찰에게 단속당하고 말았다.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 하나 없이 인생의 쓴맛을 겪어야만 했던 성완희 열사는 파란만장한 청년기를 보내며 소모당해가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전태일 열사와 같이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한민국에는 '인생막장'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사회에서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도 모두 실패해 갈 곳이 없는 사람이 결국 마지못해 선택하는 마지막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광부의 삶은 인생막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험난했다. 1986년에는 태백시 철암동 강원탄광에 입사하여 채탄후산부에 재직하는 것으로 성완희 열사는 광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광부의 삶은 무척이나 험난했다. 산업화 시기 탄광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산업 중 하나였고 광부들은 지하 수백미터에서 전등 하나에 의지해 석탄가루를 들이마시며 탄광의 마지막 장소인 막장에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어야 했다. 급여가 타 직종에 비해 조금 더 많다지만 광부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너무나도 좋지 않았고, 매일마다 죽을 위기를 넘겨야 하는데다 사고와 진폐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심지어 당시 광부들은 자본과 정권의 착취 뿐만 아니라 고용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귀족화된 어용노조가 노동자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하는 것까지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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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희 열사와 동료들은 작업장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뒤틀려있는가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바람을 뒤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하자 7월 7일을 기점으로 전국의 거의 모든 탄광에서도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성완희 열사가 속해있던 강원탄광에도 노동쟁의가 발생했으나 어용노조는 노사협상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고 고용주들의 비위만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이에 성완희 열사를 포함한 노동자들은 분노한 나머지 자발적인 농성투쟁에 들어가 파업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주도했던 성완희 열사는 이 탓에 사측의 탄압을 받게 되었고, 산업재해 사고로 인해 무릎부상을 입어 공상처리를 요청하였는데 사측에서 거부하는 바람에 결근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왔다는 이유로 성완희 열사는 첫 부당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열사는 동료들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으며 노동투쟁을 벌여 복직을 쟁취했으나 조합원이 될수없는 경비직으로 좌천되었다. 심지어 복직투쟁을 도와준 탓에 동료 이기만씨가 해고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으며, 추후 투쟁이 성공하여 성완희 열사가 원직으로 복귀하였으나 동료 이기만은 지방노동위원회의 해고무효확인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직이 거부되었다. 이에 이기만씨와 성완희 열사를 포함한 동료들이 출근투쟁을 벌였으나 구사대의 폭력에 밀려 실패하였다.

 

이기만씨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단식투쟁을 시작했고 단식 8일째에도 강원탄광 측의 탄압만이 가해지자 6월 29일 성완희 열사와 동료들은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어가 삭발 단식투쟁 및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강원탄광 측에서는 어용노조와 구사대를 동원하여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시도했고, 성완희 열사는 이에 맞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자신의 몸이 화염에 싸인 채 "부당해고 철회하고 어용노조 물러가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라고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가 노조 앞 큰길에 쓰러진 성완희 열사는 마지막 말로 "강원산업에 제발… 민주노조 좀… 건설해 주십시요" 라는 절규를 남겼다.

 

성완희 열사는 며칠 뒤인 1988년 7월 8일 아침, 3도 화상을 입어 엄청난 고통을 겪다 끝내 영면하였다. 그의 유업을 이어 강원탄광의 노동자들은 6일간의 파업을 통해 어용노조를 퇴진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노동조합에는 직선제가 이루어져 이기만씨가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출처

http://www.hannae.org/?c=user&mcd=hne0001&me=bbs_detail&idx=8016&cur_page=4&sP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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