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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사람들

인물

1980년대

이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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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31년~1985년
당시 나이 54세
경북 예천 출생
이력 1931년 경북 예천 출생
1946년 서울 상경후 서울 성도중학교 입학, 민주학생연맹 활동
1950년 서울시경에 의해 체포
1950년 6. 25 한국전쟁 발발한 시기 탈옥. 남로당 종로구 당원,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활동
1956년 서울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님과 결혼.
1959년 대한노총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결성에 참여.
1960년 4월 혁명후 대구로 와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
1968년 통혁당 관련자들의 검거로 피검. 한달여에 걸친 고문으로 ‘남조선해방전략당’ 조작. 남조선해방전략당 지역조직책으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교도소 수감.
1978년 만기출소. 보안관찰 대상. 80년 5월, 83년 대구미문화원폭파사건시 예비검속.
1985년 6. 24 고문후유증과 트라우마 등으로 스스로 유명을 달리 하심.
2014년 5.16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재심무죄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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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민중의 순박함을 사랑하며 참세상을 꿈꾸던 노동운동가 이형락

 

 

이형락 열사는 1931년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한의원을 운영하던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약을 잘못 처방한 바람에 사람이 상해를 입었다는 말을 듣자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부친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전 가산을 털어 내놓은 후 운명한 뒤, 열사는 맏형 아래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사회주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이후, 맏형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에 15세의 나이에 서울로 상경한 열사는 스스로 학비를 벌며 중학교 생활을 하다 민주학생연맹 활동으로 빌미를 잡혀 1950년 3월 1일 체포되었다. 그러나 세 달 후, 북한군의 침공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형락 열사는 탈옥하였고 남로당 종로구 당원과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56년, 이형락 열사는 서울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씨를 만나 결혼하여 슬하에 다섯 딸을 두었다. 가정을 이룬 뒤에도 이형락 열사는 사회운동에 투신하였고, 대한노총의 전국노협 결성에 참여하고 4.19 혁명 발발 이후 대구에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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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중심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형락 열사는 1964년에 발생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인해 초등학생이던 큰 딸을 데리고 몇달간 피신을 다니다가, 1968년에 통일혁명당 관련으로 연루되어 피검되었다. 한 달간 연이어 이어진 모진 고문과 매질, 그리고 협박을 토대로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단체를 정권이 거짓으로 꾸며내었고 이형락 열사 또한 남조선해방전략당에 연루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 재심에서 사형이 아닌 징역형으로 형벌이 낮춰지기는 하였으나, 이형락 열사는 교도소에 갇혀 10년 동안이나 어린 딸들과 사별해야만 했다.

 

1978년 9월 6일, 이형락 열사는 만기출소 하였으나 보안관찰 대상이 되어 전두환의 쿠데타와 대구미문화원 폭파사건때 안기부로 잡혀들어가 며칠씩 협박성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인해 심각한 증세를 겪은데다 가정의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진 열사는 결국 1985년 6월 24일, 쉰 다섯이라는 나이에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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