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김봉환
직업병 노동자 김봉환
김봉환 열사는 1938년 12월 11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1977년 원진레이온 원액2과에 입사한 김봉환 열사는 갓 태어난 딸과 가족을 위해 성실히 근무했다.
그러나 입사 후 뚜렷하게 건강이 악화되며, 두통과 소화불량, 손발 저림 등의 증상을 겪으며 1983년 원진레이온에서 퇴사하였다.
그 후 건물 경비 등의 직업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던 도중 두통과 마비증세에 시달리다 1989년에 처음으로 쓰러져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이를 통해 자신의 병세 또한 원진레이온 근무로 인해 생긴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진료를 받은 김봉환 열사는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및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후 김봉환 열사는 원진레이온 회사 측에 산재요양을 요구하였으나, 김봉환 열사가 근무하던 원액 2과가 유해부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절망한 김봉환 열사는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 허가를 요구했으나 노동부는 원진레이온 사측을 두둔하며 접수조차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김봉환 열사는 계속해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였다.
김봉환 열사는 마침내 1991년 1월 5일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를 접수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바로 그 날 운명하였다.
원진레이온 사건
원진레이온 사건은 노동자들에게 화학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안전조치 없이 근무하게 되어 이황화탄소에 노출되었던 사건이다.
원진레이온 주식회사는 일본의 도레이레이온 주식회사의 중고 기계를 들여와 1966년 처음 가동되었던 공장으로 당시로선 국내에서 유일하게 비스코스 인견사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인견사는 현재 많이 사용되는 석유를 원료로 한 합성섬유와 달리 펄프를 재료로 사용하는 섬유이다. 이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화공약품이 사용되는데, 이 중 이황화탄소는 신경독가스의 원료로 쓰이는 유해물질이다. 장기간 흡입 시 신경을 마비시키며, 단기간에 대량으로 흡입 시 질식사의 위험도 있다. 당시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이황화탄소에 대해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된 상태로 정규근로시간을 넘어서는 초과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8년 노동부에서 원진레이온 사 측에 2만 5천시간 무재해 기록증을 발급한 사실이 있다.
1988년 8월 3일 노동부는 원진레이온에 대하여 특별 근로감독을 실시, 이황화탄소가 허용기준치의 2.6배, 유화수소가 허용기준치의 1.3배 검출되었다 밝혔다. 또한 전담 보건관리자를 배치하지 않고 허위로 보고하였으며 유기용제 취급 부서 노동자들에게 특수 건강진단을 시행하지 않았던 점 등 산업안전보건법 9개의 항목에 위법한 사항이 있음을 밝혔다.
1988년 7월 22일 한겨례 신문에 이황화탄소 중독 증세를 보여 강제퇴직당한 노동자가 12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보도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이후 노동부가 뒤늦게 진상조사에 착수, 경영진을 형사처벌하게 된다. 처음 알려진 피해자 12명 이외의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피해자가 추가로 밝혀지기 시작, 1994년 9월에 집계된 피해자는 359명이었으며 특수건강검진을 받고 있거나 검진 신청을 한 사람도 400여명을 넘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다수 존재했고 그들 중 일부가 끝내 자살하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1988년 7월 23일 구리노동상담소의 제안으로 문송면 군 수은중독사건 대책위의 관련자와 함께 회의를 가져 논의, 공동투쟁을 결의하며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가족 협의회가 결성된다. 이는 1988년 8월 18일 17기구가 참여한 가운데 출범식을 가진다.
1993년 초 김영삼 정부의 출범 이후 박재윤 청와대 수석은 원진레이온을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직업병 대책과 고용보장쟁취를 위한 원진 비상대책위는 일방적인 폐쇄결정에 맞서 상여시위, 영정시위, 소복행진, 휠체어행진, 해골가면시위, 방독마스크시위 등 다양한 형태의 집회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원진 전문병원 설립, 정부 투자기관 재취업보장, 요양 중 사망자 유족보상 지급 등의 요구안을 발표했다.
1997년 4월 8일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원진의원을 개원하게 된다. 이는 직업병 환자들의 보상금의 일부를 적립해 모인 3억원이란 돈으로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1999년 6월 5일, 당시의 규모로는 장기적 전문치료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 현재의 원진 종합센터로 바뀌어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출처
https://www.kdemo.or.kr/blog/location/post/2
https://www.hani.co.kr/arti/society/archives/8478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