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김영환
민주운동가 김영환
김영환 열사는 1965년 출생의 민주화운동가이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김영환 열사는 1984년 삼척고등학교를 졸업해 고려대학교 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사회과학반 동아리 활동과 함께 각종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며 총학생회 사회부에 있던 김영환 열사는 1988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이후 김영환 열사는 1989년부터 한겨레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한미군사관계, 평화, 군대규모 축소와 남북통일 등의 주제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1991년 무렵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사건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의 후원사업회에 자료와 자문을 제공한 김영환 열사는 이런 행적들로 인해 국군기무사령부 요원들의 추적 및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 4월 25일, 김영환 열사가 행방불명 되고 말았다.
당일날 퇴근 후 행적 없이 실종된 것이었다.
이튿날 뒤인 4월 27일 김영환 열사는 성북구 장위동의 자취방에서 의문사 당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에 대해 정권이 군대 정보기관을 동원해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을 불법으로 감시하며 실시한 공작으로 인해 사고를 당한 것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적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영환 열사의 사인은 지금까지도 소명되지 못했다.
국군보안사령부
국군보안사령부는 국방부 직속 산하의 방첩 및 정보기관이다. 1991년 이후 명칭으로는 국군기무사령부가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본 목적이 대한민국 국민을 수호하고 충성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군보안사령부는 창설 이래 단 한번도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충성한 적이 없다.
일례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복무하며 고작 2년동안 무려 50개의 항일독립조직을 적발해 살해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5대 사령관 직을 맡은 적이 있다.
국군보안사령부 출신의 유명인물로는 16대 육군보안사령관 김재규, 20대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21대 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등이 있다.
군부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자국민들을 사찰하고 수사하는 역할은 원래대로라면 중앙정보부의 역할이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이후 중앙정보부의 역할은 상당수 보안사가 겸업하기 시작했다.
국군보안사령부는 창설 당시부터 대한민국 국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군사독재정권 시기에는 보안사령관이 정기적으로 대통령과 독대하여 직접적으로 보고할 정도로 국내 정치에도 수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또한 보안사는 국방부 직속 산하의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 간의 상하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국방부에서도 제대로 된 통제를 실시하지 못했다.
국군보안사령부의 대표적인 행적으로는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를 주도해 전두환 정권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것과,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와 당대의 실권자인 전두환의 명령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시기 국민들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고문한 것이 있다.
언론통폐합, 언론인 강제해직, 야당인사 정치활동규제, 민정당 창당, 국회의원 공천, 야당 정치인사 사찰, 재야인사 사찰,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가 사찰 등의 활동을 하던 국군보안사령부는 1990년 윤석양 이병에 의해 민간인 사찰과 친위 쿠데타 계획이 폭로되고 만다.
그 내용은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비상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정권에 방해가 될만한 인물 923명을 전원 검거하겠다는 계획이었고, 당시 사찰 대상 1303명 중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김영삼 당시 여당 대표, 김대중, 노무현 등의 정치인들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이 있었다.
폭로 사건 이후 국군보안사령부는 명칭을 국군기무사령부로 바꿨으나 독재정권에 대한 충성으로 복무하던 원래 보안사령부 인물들이 교체당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