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90년대

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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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통일열사 남현진

 

 

1970년 2월 22일 경북 예천 출생의 남현진 열사는 19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외대에서 민족사상연구회와 영어과 학회에 가입한 남현진 열사는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척결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에 반대하는 등의 학생운동을 실천했다.

1년 뒤인 1989년, 남현진 열사는 외대 총학생회장 사회부장을 맡고 전대협 통일선봉대에서 활동하는 등 한국외대 학생운동권 세력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이는 노태우 정권이 평양 세계축전에 남한 대학생들이 방문하는 것을 허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가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난 것을 구실로 노태우 정권은 갑작스런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전대협의 대학생 방북계획을 금지했다.

갑작스럽게 남북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은 물론이고 학생운동마저 대대적으로 탄압당한 상황이었지만 전대협 측에서는 이에 순응하지 않았다.

결국 전대협 측에서는 임수경 학생을 몰래 북한으로 입국시켰고, 이는 남북한 양측 사회에 모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남한 측의 인물이 방북하는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발생했으나, 명망있는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학생운동 단체의 핵심인물도 아닌 평범한 여대생이 입북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남한 측의 여론이 그렇게 부정적인것은 아니었으나, 임수경의 주도로 발표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에 하필이면 평화통일을 위해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자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주한미군은 당시 한국 국방안보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으로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고, 이는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할 정도였다.

이처럼 주한미군 철수가 대한민국 측에게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던 탓에 여론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임수경은 귀국 즉시 안기부에 송치되어 재판을 받아 최종 징역 5년형을 받았고 임수경과 관련된 단체들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당국에게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특히 남현진 열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인지라 임수경과 대학교 동문이고, 심지어 총학생회의 간부인데다 임수경 방북을 주도한 전대협 통일선봉대 출신이기까지 했다.

이 탓에 남현진 열사는 군 입대와 함께 부대 지휘관들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군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1991년 2월 3일 남현진 열사는 부대 근처 철조망 울타기 밖의 인근 야산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헌병대 측에서는 이를 남현진 열사의 자살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로 인해 헌병대 측에서 조작을 가했다는 여러 정황증거가 밝혀졌다.

또한 남현진 열사가 선임병들에게 마구 구타당해 부상을 입었고, 사건 당일에도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계속해서 폭행당했다는 사실 또한 드러났다.

그러나 자료부족과 군 내부의 은폐 등의 한계로 인해 남현진 열사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으며 남현진 열사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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