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민병일
민주열사철거민 민병일
1958년 12월 2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민병일 열사는 1989년부터 삼성재단 산하 중앙개발연구원에서 근무하며 택지개발사업지구에 살고 있었다.
택지개발사업은 정부 측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안정적인 주택공급을 위해 발표한 정책으로 산과 논밭 그리고 낙후된 주택 등을 갈아엎은 뒤 그 자리에 주거 가능 택지를 조성하는 것이 그 정체였다.
이로 인해 민병일 열사는 멀쩡히 살고있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처지에 놓여버렸고 1995년 9월 28일부터 구갈 철거민 대책위원회에 들어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1996년 4월 6일 구갈 철거민 대책위원회 조직부장이 되는 등 뚜렷한 활동을 보이며 투쟁을 지도하게 된 민병일 열사는 당시 김영삼 정권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1997년 2월 2일, 주택철거로 인해 어려워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닭꼬치 노점 장사를 해오던 민병일 열사는 단속으로 인해 사실상 전재산이던 장사도구를 빼앗겼다.
심지어 이는 원래 관할 관청에서 진행해야 하는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민병일 열사는 신갈파출소 소속 경찰에게 장사도구를 빼앗겼고, 민병일 열사가 이를 되찾기 위해 파출소로 찾아가자 경찰관들은 집단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곤봉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지고, 머리가 8cm 가량이나 함몰될 수준으로 심각한 폭행을 당한 민병일 열사는 심각한 외출혈로 인해 뇌가 부어올라 이를 막기위해 두개골을 열어놓은 상태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다 2월 15일 끝내 39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경찰은 민병일 열사의 죽음을 폭행사건이 아니라 의경이 민병일 열사를 밀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하였으나 담당 의사의 소견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민병일 열사의 죽음은 김영삼 정권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교사행위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