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90년대

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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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중신학의 대부 안병무

 

1922년 6월 23일 평북 안주군 신안주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안병무 교수는 간도에서 성장기를 보낸 뒤 1938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다이쇼대학 예과에 진학하였다 1942년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서양철학을 공부한 안병무 교수는 학병 문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간도로 돌아왔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월남하여 1947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하였고 1950년 5월부터 중앙신학교 교수를 맡은 그는 1951년 잡지 『야성』을 출간하였으며, 이듬해 서울 남산 밑에서 평신도 중심의 신앙공동체를 조직하였는데 이 공동체가 오늘날 향린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1956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가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불트만의 수제자인 보른캄의 문하에서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여 ‘공자와 예수의 사랑에 관한 윤리의 비교’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 귀국하여 중앙신학교 교장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안병무 교수는 1967년 후일 평민당 부총재를 역임한 여성운동가 박영숙과 결혼하였다. 신학잡지 『현존(現存)』을 창간하기도 한 안병무 교수는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한국신학연구소 설립과 신학사상 발간 등으로 한국신학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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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들어 그의 삶은 중요한 전환을 겪게 되었다. 자유를 탄압하는 한국 사회에 지식인의 신분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1972년 3선개헌 반대 100만 명 서명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안병무 교수는 1975년 3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옥고를 치렀다. 이 탓에 박정희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안병무 교수는 첫번째로 교수직에서 강제로 해임되는 고초를 겪었다.

 

1976년 3월에는 이른바 ‘3·1 구국 선언’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옥고를 치뤘으며, 자신의 신앙과 철학에도 영향을 줘 민중이 역사를 담지해온 주체이며 구원과 해방 사건의 주체임을 역설하였다. 1980년 2월에 복직되었으나 전두환의 주도로 인해 발생한 5.17 내란 이후 두번째로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어 4년 뒤에 복직되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하였고, 수많은 저서를 출간하고 재단법인 <아우내>의 이사장과 명예 이사장직을 맡았다.

 

민중신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대부 역할을 맡았던 안병무 교수는 1996년 10월 19일 오전 1시 심근경색으로 인해 74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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