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범영
청년지도자 이범영
이범영 열사는 1955년 강원도 원성군에서 태어났다.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 이범영 열사는 1976년 12월 사회에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1975년 5월,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체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탄압체제를 굳혔다. 이에 사회는 위축되어 제대로 된 저항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는데, 1976년 12월 8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박석운 학생, 백계문 학생, 그리고 이범영 열사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5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에는 수백명의 사복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기에 이는 곧 진압되었고 사건을 주동한 학생 3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철저한 언론통제가 일어난 탓에 국내 언론에서는 해당 사건이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으나 국내외로 크나큰 파장을 일으켜 일본 아사히신문에 전면 보도되고 학생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필 정도였다.
이범영 열사는 비록 최종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1979년 7월 출감되는 옥고를 치렀으나 민주화운동을 계속하여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집행국장과 의장을 역임하고, 6월 항쟁 이후 전국 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의장과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의장을 맡는 등 민주화운동을 계속해서 주도하였다.
이범영 열사는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인해 40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