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조영래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인권변호사 조영래
조영래 열사는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와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조영래 열사는 어릴적부터 사회운동에 열정적으로 임했고, 고등학교 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하며 국회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다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열사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다 학생운동에 참가했던 탓에 공부를 별로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때 고작 몇 달 공부하는 것으로 최고 득점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서울대학교 입학 직후부터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가담한 조영래는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65년 6월부터 시작된 서울대 법대 학생들의 200시간 단식 투쟁으로 인해 150명이 단체로 실려나갔을 때도 열사는 단식투쟁 현장에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조영래 열사는 전국 학생운동의 총 대장을 맡았다. 서울대학교 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교의 선배들도 조영래 열사의 의견과 판단을 받았다.
1970년 11월 13일날의 일이었다. 조영래 열사는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친구로부터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목숨을 꺼버리는 것으로 그 전까지 소외받고 있던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함께 조영래 열사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조영래 열사는 곧바로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장을 주도하고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해 행동에 나섰다.
열사는 이와 같이 서울대 재학 중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 부정선거 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 활발한 학생운동을 주도했기에 군사반란 독재정권에게 있어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이 탓에 열사는 1971년 10월, 사법시험에 합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1973년 4월 만기 출소하였다.
그러나 딱 1년 만인 1974년 4월, 열사는 민청학련 사건의 자금책으로 몰리는 바람에 6년동안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중 3년간 열사는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를 만나 전태일 열사의 동료 노동자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볐다.
3년간 걸친 각고 끝에 조영래 열사는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여 1983년에 출판되었다. 출판되자마자 당국으로부터 판매 금지조치를 당하고 출판기념회마저 탄압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에 전태일 열사 평전은 서점이 아닌 노동운동 단체와 종교단체를 주축으로 판매를 시작해 전국의 사회운동가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조영래 열사는 자신이 저자라는 것을 숨긴 채로 생활을 해야했다.
변호사를 개업한 열사는 변호사협의회 인권보고서를 집필하고, 수많은 인권변호에 전력했다. 일례로 1984년에는 한국 사법사상 초유의 대규모 집단 소송이었던 망원동 수재 사건을 맡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한국 인권변호 역사의 전설적인 사건들을 맡았다.
조영래 열사는 이 외에도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결성해 활동했으며, 노동운동, 빈민운동, 공해, 학생운동 사건들을 맡았으나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43세의 이른 나이에 1990년 12월 1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영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