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김관석
종교인 출신 민주화운동가 김관석
김관석 목사는 종교인 출신 민주화운동가이다.
1922년 7월 27일 함경남도 함흥군에서 태어난 김관석 목사는 영생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도쿄도 일본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 제국의 전쟁 야욕으로 인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인력이 필요해진 일본 정부는 학병들을 강제징집하기 시작했다.
김관석 목사 또한 징집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군대로 끌려가게 되었지만, 김관석 목사는 군사훈련 중 탈출에 성공한다.
일본 아키타 현의 탄광에서 은거하던 중 한반도가 광복을 맞이하자 고향으로 되돌아온 김관석 목사는 함흥남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민족이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본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는 신탁통치를 맞이하게 된다.
38선 이북으로는 소련군의 점령을 맞고, 이남으로는 미군의 점령을 맞게 된 것이었다.
소련의 군정지역에 속해있던 김관석 목사는 개신교 청년단인 YMCA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투옥되었다.
1946년 10월 부인 김옥실과 결혼 후 1947년 남한 측으로 월남한 김관석 목사는 조선신학교에 진학하여 장로회 목사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 기독교서회에서 근무한 이후, 1953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에서 신문학과 기독교윤리를 공부한 김관석 목사는 5.16 쿠데타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68년부터 김관석 목사는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 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KNCC라고 불리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 교단들과 정교회의 연합 단체이며 3선 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수많은 민주화 운동과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였다.
김관석 목사는 KNCC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열렬히 기여하며, 총무직을 재임하고, 특수지역선교위원회 사건으로 투옥되고, 총무직 3선에 나가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이후에는 1976년 5월 미국 이든신학교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기독교방송 사장을 지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화를 이룬 뒤에도 김관석 목사는 사회운동에서 은퇴하지 않았다.
1990년 5월에는 새누리 신문 사장에 취임했고 2000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법과 주택임대차보호법 제정 등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김관석 목사는 김수환 추기경과 함석헌 선생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이끈 종교인 출신의 상징적인 지도자였다.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김관석 목사는 현대 한국의 역사와 함께 인생을 살아왔다.
일제강점기의 고난을 거쳐 한국 기독교가 자유를 위해 어떻게 투쟁해왔는지를 보여주었고, 독재정권의 실상을 해외에 알려 경찰에 잡히고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삶 자체가 한국의 민주화를 대변하는 인생을 살아온 김관석 목사는 결국 2002년 2월 4일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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