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00년대

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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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열사 박동진

 

1962년 2월 충남 청양 출생의 박동진 열사는 1987년 2월 건국대학교를 졸업해 1989년 서울 동작구 의료보험조합에 가입했다.

노동쟁의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박동진 열사가 속해있던 의료보험 업계에는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던 당시 의료보험 업계에서는 노동권이 일상적으로 무시되었다.

결국 1989년 5월, 박동진 열사의 결단으로 서울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이 최초로 창립된다.

박동진 열사는 70일간 파업을 지도하는 등의 초대 법규부장으로서의 활동을 보였으며 1990년 2월에는 서울지역의료보험노조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한 사측에 의해 해고되기도 했던 박동진 열사는 노사합의를 통해 복직 후 사회보험노조 서울본부장으로 당선되었다.

6월 민주항쟁이 발생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동운동은 꾸준한 탄압을 받았다.

박동진 열사와 사회보험노동조합 또한 이를 피해갈 순 없었다. 

2000년 6월 마포건강보험공단에 부임한 박태영 이사장은 노동조합과의 교섭에서 노동쟁의를 멈출 것을 강요하고 조합원 범위 축소를 요구해 결국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보험공단 측은 노동조합원들이 이사장 및 임원들을 감금했다며 공권력 투입을 요청했다.

2000년 7월 1일 새벽, 국민건강보험공단 출범을 앞두고 전면파업을 개시하던 사회보험노조를 향해 경찰 3천명이 동원되었다.

농성을 진행하던 노동조합원 1,606명은 모두 연행되었고, 노동조합 측에서 물리적인 큰 충돌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원 한 명의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을 정도로 과격한 진압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동진 열사 또한 연행되어 투옥되는 탄압을 겪었다.

2001년 3월 박동진 열사가 석방된 후의 공단은 노동조합을 탄압한 뒤 눈치도 보지 않고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는 조직으로 전락하였다.

박동진 열사는 이에 반발하였지만 9명의 동료들과 함께 해고되었고 생계조차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동진 열사는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공단의 부정부패와 비리의 정점에 서있던 박태영 이사장의 이임식을 저지하려 시도했고, 박동진 열사는 이 건으로 고발당해 기나긴 수배생활을 보내야 했다.

결혼한 지 8개월만에 신혼생활을 끝내야 했던 박동진 열사는 계속해서 수배를 피해다니느라 자신의 아이가 출생하는 모습도 보지 못한 채 고된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몇년동안 끝나지 않는 고통에 심신이 지친 탓에 박동진 열사는 수배중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병원을 찾아가 검진을 받았다.

암 진단을 받게 된 박동진 열사는 진단 1달만인 2004년 2월 13일 영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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