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00년대

박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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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 박상윤

 

박상윤 열사는 6월 항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 민주노총의 인물이다.

 

박상윤 열사는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청년 노동자였던 박상윤 열사는 20살이 되던 해에 6월 민주항쟁 관련 시위에 참가하여 구속되었고, 1988년에는 남북공동올림픽 개최요구 시위를 벌이다 두 번째로 구속을 당했다. 1992년, 박상윤 열사는 한국빠이롯트만년필에 입사해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노동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1995년에는 대명정밀에 입사하였고, 1996년에는 노동자생활문화공동체 '모듬살이'의 회장 직을 역임했다. 1996년에는 광명인쇄에 입사하며 인쇄노조에 가입했고, 민주노총이 창립된지 2년 뒤인 1997년에 박상윤 열사는 서울본부 중동부지구협 사무차장 직을 역임한다. 1998년에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대선투쟁을 전개하고,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부장 직을 맡았다. 1년 뒤인 1999년은 본격적인 미조직 및 비정규 노동자 조직의 투쟁이 시작되었고, 상용직, 재능교사, 학습지, 보험모집인, 서울대 시설관리, 한국통신계약직, 방송사비정규, 동부시장, 서울지역중소기업일반노조, 덤프연대 등의 수많은 노동조직과 함께 투쟁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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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아끼지 않고 계속해서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상윤 열사는 쉬지 않았다. 그만큼 노동운동에 대한 박상윤 열사의 열기는 대단했다. 이를 증명하듯 박상윤 열사는 2000년에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을 역임했으며 2002년에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 직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가로써의 박상윤 열사는 민주노총의 상징적인 존재였지만, 인간으로써의 박상윤 열사에게 있어서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다. 박상윤 열사의 건강은 날이 가면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기만 했다. 노동 운동은 고되고 힘겨운 일이었다. 가정 문제 또한 스트레스를 주었다.

 

결국 2004년 12월 30일, 박상윤 열사는 너무나 힘겨운 고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상윤 열사를 알던 이들의 증언으로는 참으로 따뜻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박상윤 열사는 결국 망가진 사회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다 되려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져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민주노총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박상윤 열사가 쓰러진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정이라 보기 힘들다. 우리 사회를 돌보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타나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평안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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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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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선 2022-01-01 오후 15:00

참 담백하고 따듯한 사람이었던 노동운동가 고 박상윤 동지를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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