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00년대

양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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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개발 앞에 인권의 망루, 시대의 망루에 올랐던 양회성 열사

 

양회성 열사는 1952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두 아들과 함께 일식당을 꾸려 사는 것을 소원으로 삼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몇차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결국 2004년 빚을 내서 용산국제빌딩 옆에 삼호복집을 차렸으나 새 출발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용산 재개발은 몇 년은 더 있어야 진행될 예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에 급급했던 세력에 의해 2년만에 재개발 사업이 추진된 것이었다.

 

재개발 사업지구 대상자들에 대한 보상은 터무니 없이 적었을 뿐더러 법은 철거민들이 아닌 철거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철거용역 깡패들을 보호했다. 당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던 용산4지구는 이윤이 적게 나더라도 임대료가 싼 값에 책정되어 그나마 숨통이 트이던 곳이었는데, 주거세입자와 임차상인에게는 서너달 분의 주거이전비나 휴업보상비가 주어졌을 뿐이었다. 이는 다른 주거단지나 다른 상권으로 들어갈수도 없을만큼 턱없이 적은 보상이었으며 졸지에 거리에 내쫓기게 생긴 용산4지구의 철거민들과 양회성 열사는 이에 저항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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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전국철거민연합 산하의 '용산4지구 상공철거민 대책위원회'가 건설되었고, 양회성 열사는 처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철거민 연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생존권을 넘어서 구조적으로 잘못된 개발법을 바꾸겠다는 열의로 활동하였다. 2009년 1월 19일, 구청 측에서는 전혀 도와주지도 않았으며 조합과 용역의 폭력에 내몰리던 철거민들과 양회성 열사는 용산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무작정 경찰특공대를 투입시켜 이를 진압하려 시도하였으며, 철거민들과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용산 참사는 부상자 31명과 사망자 8명이 발생하는 참극을 낳았으며 한 가족의 가장이자 평범한 소상공인이었을 뿐인 양회성 열사는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의 불길 속에서 사망하였다.

 

양회성 열사는 이후 2010년 1월 9일, 355일만에 치러진 장례 후에야 이곳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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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흔히 ‘용산 참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2009년 1월 20일 강제철거에 반대하며 건물 옥상에서 농성중이었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의 회원들이 경찰과 용역 직원들을 상대로 저항하던 도중 화재가 발생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서울시는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인 용산4구역의 재개발 사업을 위하여 ‘삼성물산’, ‘대림산업’, ‘포스코건설’을 시공업체로 지정, 강제철거를 포함하는 작업계획을 승인한다.

용산4구역의 재개발 철거민들은 법적으로 규정된 3개월분의 휴업보상비와 4개월분의 주거이전비를 보상으로 받게 되었으나 이에 철거민들은 생계수단을 잃게되는 상황에서 해당 보상액수는 터무니없다며 대체 상가를 마련하는 등의 대책을 요구하였으나 묵살되었고, 2007년부터 100여명의 세입자들이 반대 시위를 벌여오게 된다.

본격적인 철거는 2008년 11월경 시작되었고 철거민들은 거처를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겨울철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 상황이었기에 이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다.

또한 서울시에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는 행정지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았으며 처벌규정이 없어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9년 1월 19일 새벽,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은 용산 남일당 건물을 점거, 경찰과 용역 직원의 진압을 저지하기 위하여 화염병과 같은 도구를 준비하였고 통로에 쇠파이프를 용접하여 만든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농성자들을 진압, 체포하기 위하여 출동한 경찰 병력을 상대로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은 격렬히 저항하였고 농성 시작 25시간 이후 경찰과 철거민 간의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긴급하다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 김석기를 필두로 한 경찰 지휘부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 진압을 결정, 당시 경찰이 화재의 위험을 인지하고 있어 유류화재 제압을 위한 화학 소방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경찰특공대가 농성중인 망루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 사전준비가 필요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경찰 지휘부는 이를 무시하고 진압 계획을 진행한다.

당시 현장 진압을 맡은 경찰특공대 제대장이 작전 연기를 건의했으나 서울지방경찰청으로부터 비아냥과 함께 진압을 강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결국 경찰특공대는 건물 옥상에 설치되어 있던 망루에 진입하기 위하여 크레인을 이용, 컨테이너로 경찰특공대원들을 이동시켜 진압하려는 작전을 세웠고 이 과정 중에서 컨테이너가 망루와 충돌, 화염병 제조를 위해 내부에 쌓아놨던 인화성 물질이 흐르며 유증기로 변해 화재가 일어나게 되었다.

망루에 화재가 나며 사망자 6명, 부상자 23명이 발생했으며 사망자 중 한 명은 경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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