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한대성
탐욕의 개발 앞에 인권의 망루, 시대의 망루에 올랐던 한대성 열사
1956년 강원 화천 출생의 한대성 열사는 철거민 사회운동가이자 용산 참사 피해자이다.
한대성 열사는 가난한 삶을 타파하고자 고향을 나와 수원 신동으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가족과 함께 단칸방 생활을 거쳐 조그마한 독채로 이사하게 된 한대성 열사는 이내 재개발이란 벽에 부딪히게 된다. 2007년 수원시에서 진행한 ‘신동지구 도시개발 사업’은 한대성 열사의 가족을 다른 주거 공간을 마련할 수 없는 적은 보상금만을 제시하며 차가운 거리로 내몰았다.
이에 한대성 열사는 2008년 6월 신동 주민들과 함께 ‘철거민대책위원회’를 결성, 주거권과 생존권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한대성 열사는 투쟁하던 과정 속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철거민들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고, 철거민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판단, 여러 차례 연대집회에 참가하였다.
2009년 1월 19일 한대성 열사는 용산4지구 철거민들과 연대하고자 망루 점거 농성에 참여하였으나 경찰특공대의 무리한 진압작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였고, 한대성 열사는 화재에 휘말려 사망하였다.
용산 참사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흔히 ‘용산 참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2009년 1월 20일 강제철거에 반대하며 건물 옥상에서 농성중이었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의 회원들이 경찰과 용역 직원들을 상대로 저항하던 도중 화재가 발생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서울시는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인 용산4구역의 재개발 사업을 위하여 ‘삼성물산’, ‘대림산업’, ‘포스코건설’을 시공업체로 지정, 강제철거를 포함하는 작업계획을 승인한다.
용산4구역의 재개발 철거민들은 법적으로 규정된 3개월분의 휴업보상비와 4개월분의 주거이전비를 보상으로 받게 되었으나 이에 철거민들은 생계수단을 잃게되는 상황에서 해당 보상액수는 터무니없다며 대체 상가를 마련하는 등의 대책을 요구하였으나 묵살되었고, 2007년부터 100여명의 세입자들이 반대 시위를 벌여오게 된다.
본격적인 철거는 2008년 11월경 시작되었고 철거민들은 거처를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겨울철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 상황이었기에 이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다.
또한 서울시에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는 행정지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았으며 처벌규정이 없어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9년 1월 19일 새벽,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은 용산 남일당 건물을 점거, 경찰과 용역 직원의 진압을 저지하기 위하여 화염병과 같은 도구를 준비하였고 통로에 쇠파이프를 용접하여 만든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농성자들을 진압, 체포하기 위하여 출동한 경찰 병력을 상대로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은 격렬히 저항하였고 농성 시작 25시간 이후 경찰과 철거민 간의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긴급하다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 김석기를 필두로 한 경찰 지휘부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 진압을 결정, 당시 경찰이 화재의 위험을 인지하고 있어 유류화재 제압을 위한 화학 소방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경찰특공대가 농성중인 망루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 사전준비가 필요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경찰 지휘부는 이를 무시하고 진압 계획을 진행한다.
당시 현장 진압을 맡은 경찰특공대 제대장이 작전 연기를 건의했으나 서울지방경찰청으로부터 비아냥과 함께 진압을 강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결국 경찰특공대는 건물 옥상에 설치되어 있던 망루에 진입하기 위하여 크레인을 이용, 컨테이너로 경찰특공대원들을 이동시켜 진압하려는 작전을 세웠고 이 과정 중에서 컨테이너가 망루와 충돌, 화염병 제조를 위해 내부에 쌓아놨던 인화성 물질이 흐르며 유증기로 변해 화재가 일어나게 되었다.
망루에 화재가 나며 사망자 6명, 부상자 23명이 발생했으며 사망자 중 한 명은 경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