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00년대

정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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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열사 정해진

 

정해진 열사는 1962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정해진 열사는 1994년까지 한국전력공사 구리지점에서 근무하고, 영진전업, 뉴서울전력, 창전을 거쳐 상신전기에 취직했다. 정해진 열사는 현장에서 불이익을 받고 사고를 당해 허리를 다쳤음에도 산재처리도 받지 못하고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며 퇴직금도 못 받은채 고용거부를 당했다. 배전노동은 그 특성상 전문성을 요구로 함에도 불구하고, 전기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한국전력 측에서 27개 배전업체에 하도급을 주면서도 제대로 된 관리감독을 실시하지 않았고, 노동청은 원래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으나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눈 앞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있는 기업들이 마구 착취에 나설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인천 전기원 총파업 도중 수차례에 걸쳐 협상을 요구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이뤄주면 회사 측에서 영업권과 경영권을 빼앗겨 이윤이 없어지고 노동조합만 돈을 벌게 된다며 교섭을 회피했다. 정해진 열사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근무했던 상신전기의 배전 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핍박과 착취를 당하고 있었으며, 이를 보고있을수만 없다고 생각한 열사는 총파업의 선봉에 나서서 투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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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투쟁은 순탄치 않았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주44시간 노동, 토요 격주휴무, 근로기준법 준수 등의 내용이었으며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각 회사 사장들은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였고, 파업투쟁을 분산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교섭을 거부했다. 자신들의 생계를 건 노동쟁의가 진전이 없자 결국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탈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해진 열사와 십여 명의 노동조합의 동료들은 끝까지 민주노조 사수를 결의했다. 때는 총파업투쟁 131일차였다. 아무도 정해진 열사와 전기원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던 암담한 상황이었고 싸움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총력집회 선두에서 투쟁을 나서다 경찰과 대치하던 중, 정해진 열사는 대오의 후미에서 달려오며 "인천전기원 파업은 정당하다", "단체협약 체결하라", "유해성 사장을 구속하라", "투쟁하지 않는 요구는 구걸이다!" 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하였다.

 

열사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투쟁을 한 당일날인 2007년 10월 27일 오후 9시경, 46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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