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10년대 이후

김선택

 

김선택.jpg

 

 

 

맑은 영혼 김선택

 

_VAM1874.jpg

 

1954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난 김선택 열사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정책위원과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정책실차장 직을 맡는 등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운동에 헌신하였다.

김선택 열사는 독재정권 당시 반독재 민주화 진영을 이끌었던 종교인 출신의 상징적인 지도자 중 하나인 문익환 목사를 수행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민주세력은 이에 부응하여 한민족의 진정한 민중해방과 자주적 조국통일을 목표로 하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결성한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위해 조직된 단체에서 부름을 받았던 김선택 열사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서도 어김없이 집행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하지만 이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0년, 선거에서 참패한 노태우 정권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3당 합당을 실시한다.

노태우 정권은 눈치를 보지 않고 민주세력과 노조운동을 초강경 자세로 진압했으며 각종 법안들을 날치기했고 사실상 독재 정권과 다름이 없는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덩달아 물가와 집값 또한 계속해서 폭등하여 자살자가 급증했고, 사회불안과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와중에 경찰이 학생운동 세력을 진압하다 학생 한 명을 구타해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학생운동 세력은 폭발했고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1991년 5월에만 8명이 연달아 분신자살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91년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소속 김기설 사회부장이 서강대학교에서 분신자살하였는데 그의 친구인 총무부장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친구의 자살을 돕는 행위는 개개인의 자유라고 인정받을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살인을 방조했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사건이 훨씬 더 보수적이었던데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이 죽는것은 옳지 않다고 본 199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에서 발생해버렸고 그 결과 국민여론은 학생운동 세력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강기훈 뿐만 아니라 김선택 열사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결백을 주장했다.

강기훈 명예회복시민모임 집행위원장까지 맡아 적극적으로 이를 도운 김선택 열사는 결국 재심 청고를 통해 2015년 무죄 최종 확정 판결이 나 강기훈 씨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후 서강대민주동문회장을 맡은 등 평생을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헌신한 김선택 열사는 맑은 영혼으로 살다 2020년 향년 66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_VAM1876.jpg

 

 

김선택.jpg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