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박영숙
1932년 평양 출생의 박영숙 열사는 소학교 시절부터 생활이 똑바르고 자기주장이 확실하여 주변에 귀감이 되던 사람이었다. 광복 이후 분단을 겪고 공산주의 체제 치하가 된 북한에서 벗어난 박영숙 열사는 사단장이던 작은아버지가 계신 전라남도 광주에서 여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 여수 순천 사건을 겪고 이화여대 재학 중 6.25 전쟁을 겪는 등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전쟁통을 겪는 와중에도 박영숙 열사는 기독교 여자 청년회인 YWCA에 가입해 열렬히 활동했다.
박영숙 열사는 전쟁고아와 피난민들을 도우며 YWCA의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농촌 계몽활동을 실천하며 한 학기를 휴학해 무료 영어강의를 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박영숙 열사의 활약을 눈여겨본 YWCA 내 인물들의 지지를 받고 훈련간사부터 시작해 온갖 직책을 모조리 섭렵하게 된 박영숙 열사는 1967년 안병무 선생과 결혼했다. 남편인 안병무 선생이 두차례 수감과 교수 해직을 겪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듯 박영숙 열사 역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1980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동아시아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알려져 있던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고문을 통해 조작한 자백 등을 토대로 사형을 구형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대학 후배였던 박영숙 열사는 구명 운동에 앞장서 활동했다. 1986년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에 반발하여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한 박영숙 열사는 6월 민주항쟁 이후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맡고 대선 TV 찬조 연설자로 나서기도 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여성 최초 비례대표 1번을 받아 원내진출에 성공하고 총재 권한대행을 지내고,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직과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장을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유엔환경개발회 공동대표, 여성환경연대 으뜸지기,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이사장, 빈곤여성 지원단체 창립, 살림이 장학재단 이사장 역임 등의 사회공헌에도 앞장섰던 박영숙 열사는 2013년 5월 17일 81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550858#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