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10년대 이후

박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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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당원 참 노동자 박영재

 

1968년 충남 서산 출생의 박영재 열사는 집안이 가난했던 탓에 어린 시절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시골 버스 차장으로 시작해 자동차 정비를 거쳐 2003년 경진여객 광역버스 운전기사로 입사한 박영재 열사가 맞이한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이었다. 경진여객의 노동강도는 매우 높아 식사시간과 화장실 갈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버스 운전기사들을 위한 노조는 보이지 않았다.

 

박영재 열사는 전태일 평전을 읽은 것을 계기로 스스로 노동법을 공부하여 부당한 현실에 맞서 노동쟁의를 하기로 결심했다. 2005년 박영재 열사는 자신들의 동료들과 함께 수원민주버스노동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이를 고깝게 보았던 사측에 의해 노동운동은 탄압을 받았고, 이에 박영재 열사는 자진퇴사로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 무렵 박영재 열사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버스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주도했다. 2008년 수원비정규노동센터 사무국장, 2009년 민주노동당 수원시위원회 부위원장, 수원민주버스노동자회 사무국장, 2011년 경기민주버스노동자회 결성, 2012년 수원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을 맡는 등 박영재 열사는 누구보다도 노동운동과 버스기사의 권리를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박영재 열사는 노동운동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어 2008년부터 한 해만을 제외하고 매번 휴가를 내면서까지 통일선봉대에 참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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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2년 5월 12일, 19대 총선을 거쳐 비약적으로 의석 수를 늘린 통합진보당에게 청천벽력같은 날이 찾아왔다.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가 발생해 수많은 인사들과 지지자들이 이탈한 것이었다. 이에 박영재 열사는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 그리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통합진보당의 분열을 극복하고 진보정당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 전날까지도 덤프트럭 운전을 했던 노동자로 살았던 박영재 열사는 2012년 5월 14일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그리고 당 내부 개혁을 요구하며 스스로 몸을 불태웠다.

 

분신을 시도한 박영재 열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40일만인 6월 22일 끝내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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