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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사람들

인물

2010년대 이후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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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33년~2021년
당시 88세
황해도 은율 출생
이력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45년 통일운동 시작
1949년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고 감화됨
1950~1951년 군복무
1952년~1961년 야학을 열어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 활동
1960년 419혁명운동에 나섬
1964년~1965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연행
1967년 장준하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 설립
1969년 3선개헌투쟁에 앞장, 박정희정권에 반대하다가 대한일보 객원논설위원 하차
1973년 유신독재에 맞선 '개헌청언 100만인 서명운동' 주도하여 구속
1974년 재야인사들과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1975년 장준하선생 암살진상규명위원회 공동대표
1976년 백범사상연구소 활동 재개
1978년 민주주의청년협의회 결성, 백범사상연구소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공동으로 '항일민족문학의 밤'을 주도하다 중앙정보부에 연행
1979년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책이 나오기도 전에 24시간만에 판금 조치를 당했지만 비밀리에 읽히며 대학가와 노동운동가들의 필독서가 됨
1980년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구속, 전두환 보안사로 끌려가 죽음 직전까지 가는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병감정 유치로 풀려나 병원에 입원됨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 확대 설립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창립해 서울지부 의장, 민요연구회, 민중문화운동연합 고문
1986년 명동성당에서 권인숙 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를 주도하다 구속
1987년 6월 항쟁 참여
1987년 민중대통령 후보로 나섬
1988년 민족통일마당집 마련을 위한 '벽돌 한돌 쌍기 운동'을 전개해 대학로에 사무실 마련
1988년 "전두환 처벌 국민 손으로, 광주학살 원흉, 5공비리 책임자 처벌" 비상시국회의 개최
1989년 '남북정치협상' 제안하였으나 무산.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인사 89인 선언. 장준하선생 시비 건립위원회 대표
1990년 전노협 고문. 노동자대학 초대교장
1991년 백골단 해체 투쟁. 강경대 김귀정열사 투쟁 주도. 페놀불법방류 규탄. 한반도 비핵 군축 공대위 발족. 반핵평화운동 상임고문
1993년 쌀수입 개방 저지 범국민대책위 결성
1998년 민족문화대학 설립위원회 대표
2000년 한양대 겸임교수. <노나메기> 창간. 평양에서 누님 상봉
2001년 노나메기 통일그날 음악회 주최
2002년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에서 선정한 올해의 우리말 으뜸 지킴이상 수상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서 부상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저지를 위한 촛불집회 참여
2009년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야기> 공연
2010년 '노나메기'운동을 제안하고 학술마당 개최
2013년 주요인사들과 4대강 파괴하는 이명박 정권을 향한 '우리 시대의 저항선언문' 발표. 민중 쇳소리 '백기완의 시 낭송의 밤' 개최
2015년 백기완의 민중사상 특강 '꼴굿떼 이야기' 개최
2016년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한 집 '꿀잠' 건립 주도
2017년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우며 추모 연작시 '쪽빛의 노래' 발표
2016년~2017년 박근혜 탄핵 시위 참여
2020년 병상에서 심산김창숙연구회가 주최하는 제22회 심산상 수상
2021년 2월 15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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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백기완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백기완 선생은 1945년 해방 이후 13세의 나이로 서울로 내려왔다. 한국이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본 미국과 소련 등지의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는 분단을 겪게 되었고, 백기완 선생은 이 탓에 이산가족이 되며 이후 통일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한민족의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백기완 선생은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6.25 전쟁에 직접 참여해 전쟁의 참화와 민족적 비극을 겪었다. 이후 1950년대엔 야학을 열어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 활동을 하던 백기완 선생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4.19 혁명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4.19 혁명을 통해 얻은 민주화의 희망이 박정희 소장의 군사반란으로 인해 사라졌고, 백기완 선생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여러 부조리에 항거하였다.

 

1964년에는 함석헌 열사와 장준하 열사 등과 함께 한일회담에 반대하다 구속되기도 하고, 1973년 유신독재에 맞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긴급조치 1호 첫번째 위반자로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39년만에 최종 무죄를 판결받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백기완 선생은 민주정권의 쟁취를 위해 힘썼으며, 1980년에는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군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병감정 유치로 풀려나 병원에 입원되는 탄압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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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은 1986년엔 명동성당에서 이른바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이듬해 6월 항쟁에서 시민대표로 연설했다. 1987년과 1992년엔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해 민주정권 쟁취와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힘썼다. 이후에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밀양 송전탑 건설, 한미 FTA 저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박근혜 탄핵 시위,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등 사회 이슈에 관심을 놓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2020년 1월부터 폐렴 증상을 앓고 입원생활을 시작한 백기완 선생은 2021년 2월 15일 한 평생을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바치고 88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출처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10215101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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