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10년대 이후

이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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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과 자주평화통일에 몸바친 혁명가 이해경

 

이해경 열사는 1940년 4월 25일 서울 출생의 농민운동가이다.

 

이해경 열사는 1961년 5.16쿠데타가 발발한 이후 ‘서울대 향토개척연합회’, ‘향토개척단’에서 활동하였고 1965년 전남 광양 옥룡 백운산 ‘산악개척협업농장’ 활동을 하였다. 1963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입학, 1967년 휴학 후 ‘비봉농업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도중 1968년 7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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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경 열사는 복역을 끝마치고 1970년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70년부터 ‘농업근대화연구소’ 활동을 하며 배터리 부품제작공장을 운영하는 생활을 지속하다 1976년 3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 1979년 10월까지 활동한다. 이후 부친의 관세사 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도중 이해경 열사는 1980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인해 구속,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고 1988년이 되서야 가석방으로 풀려날 수 있었고, 2015년 북경에서 사망한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간첩단사건이다. 1971년 재건이 기도되기도 하였다.

북한노동당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공작금을 받고 남파된 간첩 김종태를 중심으로 조직된 통일혁명당은 전 남로당원,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 등을 대량으로 포섭하여 무장봉기,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과 정부전복을 목표로 계획하던 중 검거되었다.

사건 관련인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다수의 문화인, 종교인, 학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73명이 송치되었고 주동자인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되었으며, 이문규 등 4명은 같은 해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1971년 5월 13일 전라도에 통일혁명당을 재건, 합법을 위장한 대중조직을 마련한 11명을 검거했다 발표되었다. 이들은 호남에 호남지도부를 구성, 시/도 단위 지하당을 조직, 공장/탄광/학원에 핵심조직을 조직, 혁신계 정당에 침투하여 적화통일 혁명이론을 유포하는 것을 목표로 두어 활동하였다. 11명 중 유낙진은 남파간첩, 기세문, 김행백은 고정간첩이었으며 2명은 불고지죄, 나머지 6명은 방조죄로 검거되었다.

위 사건은 남한정치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혁신정치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북한간의 냉전체제가 심화되는 문제를 야기하였다.

 

 

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86%B5%EC%9D%BC%ED%98%81%EB%AA%85%EB%8B%B9&ridx=0&tot=2

https://www.uniedu.go.kr/uniedu/home/brd/bbsatcl/nsrel/view.do?id=16111&mid=SM00000535&limit=10&eqViewYn=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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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약칭 남민전은 1976년 결성된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이다.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하였으며 1979년 10월 9일, 1979년 11월 3일 구자춘 내무장관의 수사결과 발표에 의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남민전을 주도한 이재문은 민족일보 기자로,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민청학련과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가 된 상황에서 남민전을 결성하였다.

1977년 1월 반합법 전술조직 ‘한국민주투쟁위원회’를 결성,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과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8차례 배포하였고,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을 결성하였다.

‘혜성대’라는 이름의 별동대를 조직, 자금조달을 위한 강탈 사건을 벌이기도 하였다.

1979년 10월 4일 공안기관에 의해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의 남민전 회원들이 체포되었으며 1979년 11월 총 84명의 조직원이 체포된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공산집단의 대남 적화통일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도시게릴라 조직’이라 표현하며 ‘사리사욕을 위해 재벌 회장집을 침입하여 절도했다’고 공표하는 등 부도덕성을 부각시켜 발표하였으며, 이들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1981년 11월 22일 이재문이 감옥에서 사망, 1982년 10월 8일 신향식 사형 집행,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의 인물은 무기징역 선고, 김남주, 이수일 등은 징역 15년의 형을 받았다.

관련자들은 1988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으며, 2006년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 활동을 근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3400

https://archives.kdemo.or.kr/photo-archives/view/00755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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