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90년대

김한림

 

양심수들의 어머니 김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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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어머니 김한림과 포옹하는 김윤>

 

김한림 열사는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소운 선생과 1946년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둘째 딸 김윤이 구속된 것을 계기로 김한림 열사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김한림 열사의 부친 김인식 또한 3.1운동에 참여해 고문 후유증으로 서른 세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집안 3대가 모두 열사가 된 것이었다.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4학년 때인 1974년 3월 시위를 주동했다 구속 및 제적에 처해진 딸 김윤은 민주화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허구로 만들어낸 민청학련이라는 단체에 연루되어 가장 먼저 구속된 인물이 되었다.

이때 비상군사법정 선고공판에서 딸에게 구형된 징역 10년보다 3년 줄어든 7년형이 선고되자 김한림 열사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른 학생들 보기가 미안하다" 라고 절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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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한신대 고난선언사건으로 구속된 김하범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김한림이 만든 부채>

 

1975년 2월, 딸 김윤이 풀려난 후 김한림 열사는 구속자가족협의회의 총무를 맡아 사회운동이 일어나는 곳 마다 참여하였다.

중앙정보부에도 수십차례 불려다니고 서울 시내의 모든 경찰서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열렬히 참여했던 김한림 열사는 수배중이었던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을 숨겨준 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80년 5월 17일에는 김재규 구명운동을 펼치다 현상금 1백만원이 붙은 수배자로 몰려 꼬박 1년동안 계속해서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구속자가족협의회 초대 총무직을 7년동안 맡았던 김한림 열사는 1981년 일선 자리에서 물러났다.

1년 뒤인 1982년, 남편인 김소운 선생이 작고한 후 김한림 열사는 1986년 딸 김윤이 사는 시골로 내려와 샘골 책마을 간사를 맡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김한림 열사는 1991년 3월 전북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양심수들의 대모 역할을 하며 뜨거운 삶을 살았던 열사는, 1992년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1년 6개월 만에, 향년 79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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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김한림의 석방을 촉구하는 양심범가족협의회의 성명서>

 

 

 

 

묘역찾아가는 방법 - 김소운선생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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