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10년대 이후

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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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열악하지만 가장 치열한 곳,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나서기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투쟁의 장에서 정주현 열사는 주저하지 않고 선두에 섰습니다

1990년 서울대학교 무기재료학과에 입학해 고향 김해에서 방위로 군복무를 마치고 실제 대학 생활은 92년부터 진행되었고 학생운동을 계기로 동지의 삶의 방향이 정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후 사회 진출을 할 때 동지의 전망은 노동 현장이었다는 것이 굳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96년 12월에 기아자동차에 시화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입사하고 97년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나면서 노동조합에서 옥쇄파업을 전개하면서 열사가 스스로 노동조합의 농성투쟁에 결합하면서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학생운동으로 시작해 노동자 해방을 향한 길을 따라 쉼 없이 달려온 동지의 30여년의 삶 속에서, 꼬박 20년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민주노조사수 투쟁위원회(이하 하이텍 투쟁위)’와 함께해 온 투쟁이었습니다

2002년 태광하이텍(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자본은 천지자본과 공조하여 “10억이 들든 20억이 들든 반드시 노동조합을 깨겠다

”고 공언하며 노조말살 시나리오를 가동 했습니다

98년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공단에는 구조조정과 노조탄압의 광풍이 몰아쳤고 민주노조와 지역 단체들이 모여 ‘IMF 공대위’를 꾸리고 투쟁했지만 자본과 정권의 탄압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자본가 세상에 파열구를 내기 위해서는 공장의 담을 넘은 노동자의 실질적 공동투쟁으로 투쟁하는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것이 절실하며, 그러기 위한 시작은 지역의 공동투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공동투쟁을 제안하고 조직하면서 천지산업노동조합과 태광하이텍의 두 개 사업장의 공동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개 사업장의 공동투쟁만으로도 98년 개악된 단체협약, 노동조건을 원상회복하였고, 나아가 개선시키는 성과를 냄으로써, 공장의 담을 넘은 실질적인 공동투쟁이야말로 노동자 민중 투쟁에 승리의 전망을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는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공장의 담벼락을 넘는 실질적 공동투쟁이 승리의 전망이었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자본과 정권에게 노동자 민중의 공동투쟁전선은 반드시 분리시켜 각개 격파해야 할 적대전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조탄압 만행은 천지-태광 자본뿐 아니라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수 없이 많은 사업장에서 자행되었고 이를 돌파해내지 못했던 현실은 2003년 열사정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늘 그랬듯 세원테크 투쟁도 자신의 투쟁으로 받아 안고 함께 했던 정주현 동지는 많이 괴로웠습니다

당시 세원테크지회 사무장이었던 수배된 구재보 동지를 체포, 구속되지 않도록 피신시킨 것 외에는, 세원테크 투쟁을 승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실질적인 공동 투쟁을 만들어내는데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마음은 이후 소하리 교육팀장으로 조합원 교육을 진행할 때, 연대와 공동투쟁을 조직하는 실천적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매주 목요일이면 진행되었던 태광하이텍(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조합 결의대회에 조합원 교육 일정의 하나로 소하리 공장 조합원들을 참석시킨 것입니다

중소사업장 노동조합 동지들의 질기고 치열한 투쟁에 결합하는 것을 통해 소하리 공장 조합원들이 연대와 공동투쟁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교육이었습니다

이후 진행한 조합원 교육평가설문에서 소하리 공장 조합원들은 가장 좋았던 교육으로 태광하이텍 집회 결합을 꼽았을 만큼 실제 조합원들에게도 의미 있는 교육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주현 동지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민주노조사수 투쟁위원회와의 깊은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같이 논의하고 움직이지 않았던 시절까지도 꼬박 20년 동안 동지와는 노동자 민중의 공동투쟁을 조직하는 한 방향으로 늘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 관악지사에서 조합원 전원에 대해 산재불승인의 부당한 결정을 내렸을 때 구성된 하이텍알씨디코리아지회 투쟁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에 나서면서 정주현 동지의 직접 결합이 시작되었습니다

2007년 금속노조 하이닉스 매그나칩 지회의 투쟁 과정에서 직권조인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본인의 신상이 걸려 있었던 기아차 시화 연구소 구조조정 저지 투쟁을 전개하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 매그나칩 직권조인 합의서 폐기를 위한 대책위원회’ 투쟁을 함께했습니다

비단 1년간 금속노조의 중집을 참관하며 금속노조 내부에서 절차적 내용적으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를 쓴 것뿐만 아니라 공동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통해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파열구를 낼 수 있도록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하이닉스 매그나칩 직권조인 합의서를 폐기시키지는 못하였지만 금속노조 내부에 ‘돈으로 노조깃발을 내리는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조합 활동에 있어 금기할 것이 무엇인지 그 넘지 말아야할 선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며 민주노조의 기풍을 바로 세우는데 역할을 다 했습니다

이후 사업장의 벽을 뛰어넘는 투쟁사업장의 공동투쟁을 직접 조직하기 위해 나섰고, 그 결과 2008년,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콜텍지회-서울지부 하이텍알씨디코리아지회의 공동투쟁을 함께 조직해 내기도 했습니다

단일한 목표를 건 통 큰 단결과 공동의 투쟁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절박한 투쟁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뿐, 내 투쟁이 가장 절박한 투쟁이니 먼저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 자본과 정권은 이 틈을 파고들어 공동투쟁전선을 분리시키고 각 단위별로 고립 분산시켜 각개격파로 모든 투쟁사업장들을 초토화 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지였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새벽, 급하게 용산 학살 현장으로 하이텍 공대위 동지들과 달려갔고 농성장 밑의 동지들은 고작 1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 내부의 투쟁조차 하나의 투쟁으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민중투쟁에 연대하고 공동투쟁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주현 동지는 이명박 살인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을 노동자 민중이 함께 해야 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요구하고 조직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현실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으로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주목되고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지는 늘 투쟁 전선의 확장을 통해 승리의 전망을 세워나가길 희망했지만 현실은 동지의 바램을 채워주지 못했고 매일 달려갔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의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의 투쟁은 그 이후에도 어떠한 주저함도 멈춤도 없었습니다

해고자 동지들의 전원 복직과 자신이 속한 현장에서 비정규직을 철폐시키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동자 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전선 구축을 위해 힘을 조직해 왔습니다

매주 구로지역의 노조, 단체 동지들과 함께 세월호 학살 진실 규명 및 학살정권 퇴진을 위한 대시민 선전전 및 서명전을 진행하면서 학살정권에 대한 투쟁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하이텍 공대위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공장 이전 및 노조탄압 저지 투쟁 전개하면서 끊임없이 자본과 정권에 맞서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기 위한 투쟁사업장, 투쟁하는 민중의 공동투쟁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쉼 없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동지의 자리는 늘 투쟁하는 동지들의 곁이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동지의 자리, 직함이 바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민주노조사수 투쟁위원회(이하 하이텍 투쟁위) 연사팀장이었습니다

정주현 동지는 하이텍 투쟁위 연사팀장으로 ‘정리해고 철폐! 노동자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 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이하 투쟁사업장 공투위)’의 총무팀장 및 서기 역할을 맡아 헌신적인 투쟁을 했습니다

노동 3권 쟁취!’를 위한 고공농성투쟁을 전개할 때, 동지는 농성장을 지키며 공투위 동지들과 함께 유력 대선 후보들의 연단에 올라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및 기본권 쟁취를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승리로 귀결되지는 못하였고 2019년 원심력이 강해진 투쟁사업장 공투위는 결국 해소되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1월 진행하였던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과 금속노조의 원칙 회복을 위한 공동투쟁’이 ‘때론 지더라도 해야 할 싸움이 있다’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동지의 마지막 투쟁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동지를 따뜻하게 챙기고 살폈던 동지가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끝내 노동자 민중의 공동투쟁을 성사시키고 승리의 전망을 세워내고자 했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022년 3월 10일 먼저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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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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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댕이 2024-03-11 오후 21:39

어디서 이런 사람을 또 만날까!

하늘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

요즘은 쏜살같은 세월이 맘에 든다.

빨리 만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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