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박현환오산중학교에 봉직하던 중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인사 중 최남선이 남강 이승훈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현상윤을 통하고, 현상윤이 김도태에게 연락하자 때마침 김도태의 집에 머물던 박현환이 그 임무를 받아 선천에 가 있는 이승훈에게 연락하기에 이른다. 3·1운동 뒤 국내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잠입하였다가 그 길로 곧장 상하이로 갔다. 박현환은 1919년(28세)에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원 조사과 과원, 독립운동사 자료편찬위원으로 봉직하였고, ‘신한청년’지와 ‘독립신문사’ 기자로 활약하였다. 박현환은 원동임시위원부에서 도산의 직접 지도하에 1920년 5월 6일 흥사단에 입단(서약)하였다.
1922년에는 수양동맹회 창립위원으로 수양동우회를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1937년(46세) 6월에 동우회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날에는 단의 사무소를 자신의 자택에서 을지로2가 199번지 한국공인사(옛 대성빌딩)로 옮기고, 그해 12월 18일 부산으로 피난할 때까지 거의 홀로 단 본부를 지켰다. 부산 피난에서 돌아와서는 대성빌딩 구내 움막 같은 처소에서 생활하면서 건물을 보살폈다. 특히, 1958년 5월 흥사단 대성빌딩을 재건하는 데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1955년에는 ‘흥사단 운동’을 편저하여 흥사단 운동의 확산에 전력하였다. 박현환은 본부를 국내로 옮겨온 이후 72세의 노령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흥사단의 모든 실무를 총괄하면서 고락을 같이했다.
이광수, 김여제, 박현환의 인연은 오산 학교 시절에서 맺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사제 관계이자 동지로 맺어진 이광수, 김여제, 박현환은 삼일 운동 직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투신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좀 터울이 지는 시인 주요한도 함께했습니다. 주요한은 1900년 생입니다.
이렇게 네 사람은 망명 정부의 기관지 <신한 청년>과 <독립신문>을 이끌었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사료 조사 편찬회에서 활동했습니다.
이광수, 김여제, 박현환, 주요한은 상하이에서 흥사단 원동(遠東)위원부의 초창기 단우로 활약하게 됩니다.
흥사단의 단우는 지역별로 각자 고유한 일련 번호를 갖고 있습니다.
이광수는 103번, 주요한은 104번, 박현환은 105번, 김여제가 106번 단우입니다.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해외 조직인 흥사단의 상하이 지역 기반이 바로 이들 네 사람의 손으로 다져지게 된 것입니다.
박현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수양 동맹회를 조직하고, 수양 동맹회와 동우 구락부를 합쳐 동우회를 조직했습니다.
동우회가 바로 해외 조직인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자 지금의 흥사단입니다.
그리고 1937~1938년에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 무려 180여 명이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이 이른바 동우회 사건입니다.
안창호는 결국 가출옥 상태에서 타계하고 이광수도 신병이 악화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고 맙니다.
해방 직후에 흥사단 국내 위원부 재건에 앞장선 것도 역시 박현환이었습니다. 이광수, 김여제, 주요한 역시 흥사단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 인사였지만 박현환은 막후에서 실질적인 조직 재건과 실무를 도맡은 것으로 보입니다. 해방 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흥사단의 해외 조직과 국내 조직이 통일성을 갖추게 됩니다.
흥사단 흥사단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yk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