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80년대

박영진

 

박영진.jpg

 

 

노동열사 박영진

 

 

박영진 열사는 1960년 충남 부여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영진 열사의 가정은 매우 궁핍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국민학교 1학년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가정형편을 바꿔보고자 가족 전체가 상경하였지만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하고 어머니는 노점과 파출부 일을 하는 데에서 그쳤다. 박영진 열사는 자신의 여동생이 학업을 중단해 공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중학교에 다녔지만 끝내 공납금을 내지 못하고 결국 중퇴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그만둔 박영진 열사는 공사판 잡일을 돕고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생활을 했지만 가난이라는 족쇄에 묶여 암울하고 비참한 나날을 보낸 탓에 친구들과 방황하며 일곱 차례나 구류되었다. 23세가 되던 해, 박영진 열사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 마음을 다잡고 시흥야학을 다니며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야학은 생활야학에서 벗어나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타고 노동야학으로 변화했고 학생운동세력 출신의 야학교사들은 검정고시 공부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던 지식들을 얼떨결에 배우게 된 박영진 열사는 처음에는 당황하여 야학을 포기하려 했으나 이내 새로운 삶의 길을 찾게 되었다. 박영진 열사는 야학 교사들과 어울려 지내며 그간 수십년간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피를 흘려가며 권리를 쟁취했는지를 깨달았고 설령 대학에 붙는다 하더라도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결국 박영진 열사는 내가 잘되지 못하더라도 이 나라의 모든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수있는 세상이 오도록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_VAM1785.JPG

 

 

1984년 1월 동도전자를 거쳐 7월경 구로공단의 동일제강에 입사한 박영진 열사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박영진 열사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치며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이후 박영진 열사는 회식비 명목으로 돈을 걷는 회사에게 항의했고 이 탓에 회사에서는 박영진 열사를 포함해 그간 노동문제를 열사와 함께 거론하고 다녔던 동료 15명을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박영진 열사는 그 뒤에도 노동자들과 공조하여 민주노조를 만들어 불법해고와 노동법 위반 등을 근거로 노동쟁의를 펼쳤다.

 

1985년 신흥정밀에 입사한 박영진 열사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의견 차이를 극복하고 서울노동운동연합과 연대하여 1986년 3월 17일 파업농성투쟁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박영진 열사와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파업농성을 벌이지도 못한 채 관리자들과 경찰에게 쫓겨 옥상에 내몰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판단한 박영진 열사는 몸에 석유를 뿌린 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 노동운동 탄압 말라!" 라는 구호와 함께 몸에 불을 붙여 분신하였다.

 

 

박영진 열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로 1986년 3월 18일 오전 3시 30분경 2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_VAM2175.JPG

 

 

_VAM2176.JPG

 

[크기변환]박영진묘역(5인합장) (1).jpg

 

[크기변환]박영진묘역(5인합장) (2).jpg

 

[크기변환]박영진묘역(5인합장) (3).jpg

 

 

 

 

박영진.jpg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