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우종원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운동가들중 정권에 의한 의문을 죽음을 당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한분이 우종원 열사이다.
우종원 열사는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청년으로, 1962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81년 대구 달성고 졸업, 서울대 사회과학대 사회복지학과 입학, 1983년 11월에 서울 시내에 전두환 정권의 부도덕성과 민주화 운동을 촉구하는 유인물 배포 사건, 집시법 위반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4년 5월 1일 교황방문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민추위) 산하 홍보위원회에서 학외유인물책으로 활동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독재통치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시위 현장에 배포하는 활동을 하는 등, 서울대 운동권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하였다.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이른바 ‘민추위 사건’은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를 이적단체로 규정해 관련자 26명을 구속한 사건이다. 수도권 10여개 대학의 대학생들 위주로 80여 명의 사람들이 기소 또는 수배된 대형 공안사건이었다. 1985년 학내 민추위 관련으로 수배생활을 하였던 동지는 10월 11일 경부선 철로 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되었다. 사망 전 형사들이 수시로 집으로 찾아와 자수시키라며 협박하였고, 의문의 죽음 이후 화장하는 날까지 안기부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한 정황이 파악되는 등 동지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우종원 열사가 독재정권에 의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념과 실천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 민추위 사건에 대한 설명
개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부림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더불어 5공 시기에 일어난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건 중의 하나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해 관련자 26명을 구속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깃발 사건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2012년 말에 개봉한 영화인 '남영동1985'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내용
민주화추진위원회는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 조직으로, 약칭은 '민추위'이다. 산하에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 연락책 등 4개 기구를 두고 1985년 3월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 5월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주도하였다.
또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 시위 등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1984년에는 민추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 올바른 운동 방법,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지하신문 《깃발》을 두 차례에 걸쳐 발행하였다. 이 때문에 세간에 '깃발 사건'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로 인해 5공화국 정부는 깃발 전담반을 설치하고,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이후에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이어 1985년 10월 29일 검찰은 민추위를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로 규정한 뒤 관련자 26명은 구속, 3명은 불구속 입건하고 17명은 지명수배하였다.
검찰은 민추위 관련자들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들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과 관련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김근태 의장이 구속되어 이근안과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최상남 등 5명의 경찰로부터 물고문·전기고문 등을 받았다. 김근태 전 장관은 이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1년 12월 결국 타계하였다. 이때 당시 김근태 의장이 겪었던 22일간의 섬뜩한 이야기는 《남영동》이라는 책에 잘 나와있으며,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2012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에서 김근태 전 장관은 '김종태'로, 이근안은 '이두한'으로 나온다.
한편 당시 민추위 위원장은 PC통신 나우누리와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TV로 유명한 나우콤의 문용식 전 사장이었다. 문용식은 서울대 국사학과 79학번으로 총학생회장을 거쳐서 1985년 민추위를 결성했다가 구속돼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총 5년간 복역하다가 1990년 출소했다. 이후 늦게 학교를 졸업한 후에 1992년 나우콤의 전신인 BNK에 입사해서 사장 자리까지 오른다.
학생운동의 족보로 보면 당시 서울대 민추위는 사구체 논쟁 중에 정립된 소위 ND 그룹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사건의 배경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1983년 12월 유화조치로 피어오른 민주화의 불길이 1985년 2월 12일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정권 반대를 외치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신민당이 떠오르고, 대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을 점령하고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전두환 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이 날로 거세지던 시기였다. 또한 잘 알다시피 이 시대는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이 사건은 군사정부 시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용공 사건과 마찬가지로 정권 안정을 위해 일부러 조작한 사건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사건 이후
사건 이후 이들은 교도소 내에서도 힘든 수형생활과 인권 침해를 당해야 했으며, 특히 관련자 중 안병룡은 1986년 7월 28일에 교도소 내 양심수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다 경비교도대 등에게 고무호스 등으로 두들겨 맞아 왼쪽 눈 언저리가 찢어지는 비극을 겪었고, 김근태만큼 잔혹한 고문을 당한 이을호 민청련 상임위 부위원장은 석방 후 정신분열증을 평생 안고 가게 되었다.
국민의 숨소리까지 감시하던 군사정권 시절이라[1] 사건은 이대로 묻히는가 싶었지만, 김근태씨의 아내 인재근씨가 이 당시 고문 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폭로하여 전세계에 알려졌고, 1987년 부부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일 함부르크재단이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그 이후 전혀 재심이 이루어지지 않았고,[2] 피해자들은 오랜 기간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러나 김근태가 사망한 뒤 아내인 인재근 의원이 이듬해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재심후 무죄를 선고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근태 뿐 아니라 사건 관계자들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사건 관계자들이 협박·강요·고문을 당했다며 법정 진술을 번복했다"면서 "고문 등 당시 경험에 대한 이들 진술의 상세성, 당시 연행 과정에서도 영장 제시 등 적법한 절차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위법한 수사가 이뤄졌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는 "강요된 상태에서 한 진술은 실체적 진실에 대한 오판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어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라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