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김용갑
조국을 사랑한 청년 김용갑
1966년 1월 29일에 태어난 김용갑 열사는 학업을 이어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고등학교를 중퇴했으나, 3년 뒤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졸 자격을 따냈다.
1989년 김용갑 열사는 동우전문대 양식학과에 입학했다.
김용갑 열사는 입학 1달만에 동우대학 신문사 기자에 지원해 합격했고, 기자로 활동하며 교내 도서관 시설 문제 등을 취재했다.
그러나 동우대학 신문사는 자율적으로 신문을 편집할 권리가 없었다.
교내 재단 측의 입맛에 맞는 신문만을 내보내도록 강제로 편집당해야 했던 것이었다.
김용갑 열사는 이에 신문 편집 자율권을 요구하며 기자 자리에서 사퇴한다.
학원비리와 재단 측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당시 동우대학의 상황을 뒤바꾸기 위해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9월, 김용갑 열사는 동우학원 민주실천위원회에 가입하여 전교조 합법화 쟁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노력은 아직 부족했다.
동우대학 재단은 폭력과 공권력을 동원해 교내 민주주의가 힘을 얻는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11월, 김용갑 열사는 동우대학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다.
학교 측에게 보란듯이 김용갑 열사는 압도적인 표차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된다.
김용갑 열사가 입학한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은 채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학교 측은 조직폭력배 출신 인물 두명을 교직원으로 채용하여 총학생회를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용갑 열사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겨울방학동안 김용갑 열사는 끊임없이 학교 측에 맞섰다.
김용갑 열사는 우체국 시설, 휴게실, 장학금 인상 등의 10여 개의 교내 복지 문제를 승리로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장학금 비리 및 부동산 투기 등의 재단 비리를 밝히기 위해 학내 집회를 열어 주도했다.
입학 다음 해인 1990년, 학교 측에서 주도해온 폭력적 탄압 행위는 점점 심해졌다.
학교 측에서 장학금과 함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은 총학생회가 개최하는 행사에 들이닥쳐 학생회 간부들을 폭행했다.
교직원 중 한명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시켜서 차로 갈아버리겠다. 갈아 버려봤자 6개월이면 풀려난다." 라고 위협했다는 증언 또한 있었다.
심지어 3월 초 신입생 환영회 날에는 10여 명의 폭력배가 총학생회 간부를 납치해 감금한 뒤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폭력은 학생회장 김용갑도 피해갈 수 없었다.
김용갑은 20여 일간 일곱 차례의 폭행을 당했다.
같은 해 3월 28일, 김용갑 열사는 사망한다.
총학생회 발대식이 개최될 예정이었던 당일 날 새벽이었다.
다음 날 학교 폭력배 문종석은 자신이 뺑소니 사고를 내 김용갑 열사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자수했다.
사건 현장에서 김용갑 열사를 고의적으로 살해한 여러 정황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이를 단순 교통사고로 단정지었고 운전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90년 10월,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재단이 사주한 폭력배 문제는 여전했다.
1991년 3월경 김용갑 열사 1주기 추모제가 열릴 무렵, 폭력배들은 추모제를 준비하던 학생들을 습격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폭력배들과 맞서 싸워 학교에서 쫓아냈다.
김용갑 열사가 사망한 이후에도 학생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학우였던 고상만에 따르면 김용갑 열사는 엄청난 음치였다고 한다.
김용갑 열사는 적당히 남들 하는것처럼 고개 숙여 살며 남들에게 그저 노래 못부르고 공부 잘하던 동창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김용갑 열사의 천성이 아니었다.
비록 김용갑 열사는 3월의 비바람 속에 사라졌지만, 동우대학의 학우들 가슴 속에는 학생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학생회장으로써 영원히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