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문익환
통일의 선구자, 겨레의 벗 문익환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 출생의 문익환 열사는 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룽징 소학교를 다니며 윤동주, 장준하와 절친한 사이였던 문익환 목사는 일본신학교와 한국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고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참가하는 등 한국 기독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문익환 목사는 친구였던 사회운동가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1974년 10월 반유신 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 참가를 시작으로 민주화 운동세력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976년 3월 1일에는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초안하여 명동성당에서 발표하였다가 국가 전복 선동 혐의로 여러 재야인사들과 함께 투옥되고 동생인 문동환 목사, 그리고 아내, 맏아들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었다.
감옥에 수감된 기간동안 문익환 목사는 25일간 옥중단식을 시행하기도 했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날수도 있었으나 1987년 10월경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했다 재수감 되기도 하였다.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의 대부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문익환 목사는 계속해서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1980년 5월 17일에는 내란예비음모죄로 연행되어 복역하였고, 1985년 5월 20일에는 대학 순회강연 중 선동죄 명목으로 수배되어 1심에서 3년형을 받았고, 1986년 5월에는 이동수 학생의 분신투쟁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수차례 옥고를 치뤄야만 했다.
군사독재정권 붕괴 이후 문익환 목사는 통일운동에도 투신했다.
1988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 측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당선되는 사태가 발생해 문익환 목사는 이를 책임지겠다며 민통련 의장직에서 사임하였다.
이후 7월에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 협의회 공동대표가 되었고, 1989년 1월에는 전민련 상임고문을 맡아 활동을 주도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1989년 3월경, 전세계적 탈냉전 분위기와 함께 조성된 남북 화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북통일에 미온적인 정부 당국자들에 불만을 가진 문익환 목사는 직접 방북하여 김일성과 통일문제를 논의했다.
노태우 정권은 문익환 목사를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투옥하였고 1990년 10월경 형집행정지로 석방하였으나 이후 전두환 정권과 다를 것 없는 공안정국을 조성해 문익환 목사를 1991년 재수감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던 문익환 목사는 1993년 초 석방된 이후 범민족대회와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하는 등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하던 중 1994년 1월 18일 심장마비로 인해 영면하였다.
'통일은 됐어'라는 말과 함께 치열한 통일운동에 투신하고, 반독재 투쟁을 이끌던 문익환 목사에게는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으며, 몸담았던 한신대학교에는 문익환 목사를 추모하는 시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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