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성순희
통일열사 성순희
가족과 함께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는 인생을 살았던 성순희 열사는 1938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부산여중과 남성여중을 거쳐 새한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남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순희 열사는 1959년 남편 손병선씨와 결혼했다.
성순희 열사는 4.19 혁명을 계기로 자신의 남편과 함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4.19 혁명을 거치며 생긴 민주화의 희망도 잠시, 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이를 짓밟자 성순희 열사 부부는 이에 항거하였고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의해 남편 손병선 선생이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온갖 어려움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성순희 열사는 생선장사를 하며 남편을 옥바라지하고 세 딸을 위해 살았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현재를 희생하는 부모의 삶을 이어받고 각자의 역할을 찾아 나서기로 한 성순희 열사의 큰 딸 민옥은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둘째 민영은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했으며, 셋째 딸 민아는 노동현장에서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성순희 열사의 가족은 한 덩어리의 통일가족이 되었고 모두가 사회운동에 함께 이바지했다.
일례로 성순희 열사는 1989년 10월 큰딸 민옥이 교육현장에서 해직되자 전교조 교사가족회 서울지역회장과 전국 부회장을 맡아 교육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1992년 9월 26일, 남편 손병선 선생이 안기부에 연행된 뒤 성순희 열사는 기나긴 수배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고초를 겪으며 악화된 성순희 열사의 몸은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했고 1993년 7월 7일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성순희 열사는 결국 1993년 8월 15일 55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