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장기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 선생은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의 수제자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사실 장기려 의사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한 것은 집안이 가난해 학비가 제일 적게 드는 곳을 선택한 것이었고, 원래는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교사로서 평생 헌신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성적과 학비 문제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공학자로서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에 여순공과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예과 시험에서 탈락해 결국 찾아간 곳이 의대였던 것이다.
해당 학교의 조수 및 강사로 8년간 일하다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고, 스승 백인제의 추천으로 대전도립병원 외과장 자리가 제의되었으나 장기려 선생은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이후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장으로 부임한다. 북한 지역에서 매우 명망이 높았으며 김일성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집도한 뒤 장로회 신앙을 존중받아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허용될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평양의과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해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부상병들과 피난민들을 치료했으나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평양이 다시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부인 김봉숙의 권유에 따라 차남 장가용과 함께 부산으로 피신했고 그 뒤로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영원히 사별하고 말았다.
피난민들이 가득한 부산에서 잠깐 제3육군병원 외과 근무를 하다 따로 나와 복음진료소를 개설한 장기려 의사였으나 북한에서 김일성을 수술해준 인연으로 매우 우대받았던 이력 탓에 방첩대에 끌려가 문초를 여러번 당했다. 장기려 선생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의사였지만 평생 낮은 곳에서 청빈하게 살며 자신의 의술을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베풀었다.
눈물과 정이 매우 많았으며 봉사와 박애의 사례를 수없이 실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걸인에게 한 달 월급 수표를 통째로 주고, 치료비가 없던 환자에게 자신의 월급을 가불해 주고, 치료비 대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밤에 뒷문을 열어 몰래 탈출시킨 것이 있다. 이 말고도 장기려 선생에게는 수많은 미담이 있으며 특히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해 헌신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다.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한 장기려 선생은 선의로 인건비를 제외한 의료수가를 책정했고 이는 현행 의료보험제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장기려 선생은 6.25전쟁으로 인해 헤어진 부인을 그리워하며 죽을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북한 정부 측에서 남한에 의해 장기려 선생이 납치되었다고 믿고 있었기에 장기려 선생의 북측 이산가족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살았고, 이 탓에 가족들의 안위를 생각해 차마 이산가족 상봉조차 이룰수 없었다.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않고 병원 옥상의 사택에서 살았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장기려 선생은 의술을 베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의료보험까지 만들어 그가 살린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의 장로회 기독교 신앙에 기반해 한 평생을 봉사와 박애, 그리고 무소유를 실천한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려오고 있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