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강은기
민주화의 밑거름 영원한 인쇄인 강은기
강은기 열사는 1942년에 태어나 민주화를 위해 투신한 인물이다.
강은기 열사는 전북 남원 쌍교리에서 아버지 강용갑과 어머니 진차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8년 남원중학교에 다니던 강은기 열사는 졸업을 고작 4달 남긴 상태에서 자퇴한다.
1년 뒤인 1959년, 강은기 열사는 남원의 한 인쇄소에 취업하여 활판 인쇄기술을 배우게 된다.
1960년 3월 30일에 상경해 응암동 나300호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그는 얼마 안 가 인생에서 제일 큰 변화점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한 국민들이 4.19 혁명을 일으킨 것이었다.
강은기 열사는 국정의 변혁을 꿈꾸며 4.19 혁명의 대열에 참여했지만 그의 희망은 얼마 가지 못했다.
1년 뒤인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에 실망한 강은기 열사는 그 해 5월,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하였다.
1963년 환속한 후 남원중학교 동창인 이해학과 재회한 강은기 열사는 다시 응암동 나300호에서 공동체 생활을 이어나갔다.
강은기 열사는 1964년부터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인쇄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강은기 열사는 흥사단과 YMCA 등 민주운동에서 굵직한 활약을 한 단체에서 류영모, 함석헌, 안병무 등을 만나게 된다.
반독재 저항운동의 핵심적인 인물들과 수강하며 개혁, 참여, 민중신학과 역사현실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 강은기 열사는 시대사명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출범하던 1972년, 강은기 열사는 세진문화사를 설립한다.
세진문화사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든 달려가 인쇄유인물을 제공하게 된다.
당시 정권의 탄압을 받을까봐 인쇄 부탁조차 어려웠던 민주화운동 관련 유인물을 유일하게 어떻게든 인쇄해 주는 인쇄소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강은기 열사는 KMCO로 통용되는 단체인 수도권도시선교사위원회 시위에 참가하여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보름간 동부경찰서에 구금된다.
또한 한통련 기관지 ‘민족시보’관련으로 중앙정보부에서 10일간 조사받기도 하였으며, 박형규 목사의 저서를 제작 중 중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975년 5월 17일, 함석헌 선생의 주례로 강은기 열사는 양희선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가정을 꾸리게 된다.
평화로운 가정을 위해 민주화운동을 포기하고 인쇄시설의 사장으로 살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은기 열사는 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하여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인쇄를 부탁한 단체들이 돈이 없어 주문 대부분이 외상인데다 돈을 제대로 받은 적도 거의 없어 직원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못 주고 오히려 잘라야 할 만큼 빈궁했다.
세진문화사의 인쇄물들이 독재정권의 눈엣가시였던것은 물론이고 제작처를 파악하는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탓에 수시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강은기 열사는 언론의 입이 닫혀있던 때 민주화운동의 유일무이한 펜 역할을 하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교수와 언론인들이 대거 해직당하던 1976년 무렵에는 이해학 목사의 명동 3.1 시국선언서 배포 건으로 성남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978년 3월 16일에는 인권운동 유인물 제작건으로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다음해인 1979년 3월 29일에는 동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0.26 박정희 암살사건 이후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치하에서도 강은기 열사는 멈추지 않았다.
1980년 3월에는 김재규 관련 유인물을 제작하여 국군 보안사령부에 연행 후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관련으로 1년 1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1984년 10월에는 성동경찰서에 연행되어 11월 1일에 석방되었다.
1985년 5월에는 안기부, 문공부, 경찰의 합동 수사로 인해 연행되었다.
1986년 8월에는 김세진 열사 자료집 제작으로 중부경찰서에 연행되었고 벌금 처벌까지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강은기 열사는 대한민국과 함께 민주주의를 맞이했다.
이후 1988년 9월 3일 한국인쇄문화운동협의회가 설립되어 초대회장이 역임했다.
1995년에는 국민정치산악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이 되었다.
2002년 5월에는 전북민주동우회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강은기 열사는 췌장암이 발병하여 백병원에서 입원치료 중 11월 9일 영면하였다.
서울 보라매병원의 한 영안실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방용석 노동부 장관, 김근태 의원과 장영달 의원 등의 인사들이 화한을 보냈다.
강은기 열사는 ‘민주사회장’으로 장례 엄수 후 이곳 마석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인 2005년 4월, 강은기 열사는 민통련 창립 20주년 행사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