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강희남
민주와 민족통일에 헌신한 강희남
강희남 열사는 목사 활동과 함께 민주화 운동과 민족 통일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1920년 전북 김제 농가에서 강학용 공과 류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강희남 열사는 1935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문수학과 독학의 길을 찾는다.
정복님 여사과 결혼 후 예수교에 입교하고 슬하에 3남 4녀를 둔 강희남 열사는 1947년 한국 신학대에 입학한다.
19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은 후 1959년 경에 전주 영생 중고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한다.
1963년에는 전주 성광교회를 비롯해 난산교회 등 목회에 전념하던 강희남 열사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큰 사건을 겪게 된다.
바로 1977년 난산 교회 시무 중 박정희 정권에게 도전하다 전주 감옥에 투옥된 것이었다.
1980년초 출소한 강희남 열사는 1983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통련을 창립한 후 대의원총회 의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같은 해에 아내와 사별하게 된다.
이후 기독교 농민회 이사장을 역임한 강희남 열사는 1987년 전북대 강연으로 두번째 투옥을 당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에도 항쟁했듯이 전두환 정권에게도 굴하지 않은 강희남 열사는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감옥에서 40일간 단식투쟁을 진행한다.
그 해 6월 민주항쟁으로 결국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 출소하게 된 강희남 열사는 1988년 조성만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는다.
비록 대한민국의 정치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아직 민족은 분단되어 총칼을 겨누고 있다는 실정이었다.
한민족의 자주통일에 매우 강렬한 열정을 품고 있던 강희남 열사는 이후 사망할 때까지 통일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2009년 5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남북관계가 파탄난 것에 대한 책임이 이명박 정부에 있다 생각한 강희남 열사는 일주일간 단식 투쟁을 전개했다.
다음 달 6일, 강희남 열사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중항쟁을 주장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89세였다.
마지막 고별사
<8천만 동포들에게>
강희남
더는 그만두고 왜놈들의 강제로 1905년 (을사) 륵약 체결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명이 순절했는데 그 중에도 민영환 선생을 모시던 인력거꾼이 뒤를 따라 자살했
고 송병선 선생 댁 소녀 식모 공림이 식도로 목 찔러 죽었다. 송병선 선생은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義)조차 망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이 항상 식민지 백
성 된 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돌아보건대 1945년 종전 공간에서 양키 제국주의자들이 제맘대로 38선을 그어 쏘련 측의 동의를 얻어 국토를 량단해 놓고 마땅히 전승극 대우를 받아야 할 (북에서 쏘련군은 그렇게
했음)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와 중앙청의 일장기를 내리고 저들의 성조기를 세웠으니 이는 이 땅의 주인이 자기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군정에서, 북의 쏘련군과는 정
반대로, 친일파를 대거 등용함과 동시에 상해 림정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완전 배제해 버림으로 이 땅의 력사를 개판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 여운형 등 애국지사들을 차례로 제거해 버리고 저들의 똘만이 리승만을 세운 뒤 소위 비밀주권(secret sovereignty)을 움켜쥐어 오늘날에까지 무불간섭이요, 무불착취
다. 포츠담 선언에 의해 48년 북에서 쏘련군이 철수하자 양키군들도 49년 7월에 1단 철수했으나 저들은 곧 이를 후회해서 이 땅에 재상륙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함으로 Achison Line
을 설정하여 일본까지만 자기들 방위선 안에 두어 지키고 한반도는 방위선 밖에 버려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북측에 보여줌으로 북을 유인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켜 이 땅을 재점령
한 뒤에 전쟁 끝나고 북에서는 중공군이 완전 철수했으나 저들의 군대는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이 땅 식민지화에 100%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또 방위동맹의 차원에서 우리 령토 령해 령공할 것 없이 완전히 자기들 임의에 맡겨있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방위동맹은 허울뿐이고 완전히 예속동맹인 것이다. 력사와 민족의식이 있
는 사람이라면 어찌 분노하고 통탄하지 않겠는가? 실로 해 저믄날 따옥이 소리에 한숨짓고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에 눈물 찧던 세월이 얼마이던가? 외세척결과 민족통일을 바
라 쓸모없이 늙은 이 한 마리 학은 목이 길어서 더욱 서럽다.
통일운동은 바로 양키추방 운동과 직결된다. 신념으로 오랜 동안 싸워본다고 했지만 이 땅의 괴뢰정권과 보수주의 매국노들의 세상에서 이란격석이 아니던가? 이 치욕스러운 력사를 산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옛 어른들은 가이생어생(可以生於生)이요 가이사어사(可以死於死)라 ‘가히 살만한 때에 살고 가히 죽을만한 때에 죽으라’ 가르치지 않으셨던가? 살아
도 애국이요 죽어도 애국이 있을 뿐이다.
나는 민족적으로 못하면 개인적으로 라도 그들에 대한 노예신분 청산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려있음을 어이하랴? 내가 대전 감옥에 있을 때 꿈에 대마도에서 절식(단식)으로 운명
하신 최익현 선생을 뵈었는데 내가 선생을 부액해 모시고 가면서 춘추를 물으니 73세시란다. 그렇다면 나는 선생보다 17개년을 덤으로 살았으니 이것도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는다.
중국춘추시대 초나라 오자서가 목숨을 피해 오나라 망명길에 오르면서 핏덩이 같은 어린 왕손 승을 안고 그 천신만고 9사1생의 길을 간 것은 오직 그 어린애만이 장차 초나라 왕통
을 이을 존재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처럼 양키추방과 련방제 통일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라
는 신념 하나를 멍든 가슴에 안고 내 집을 양키 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 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
로 말이다.
단기 4342(2009)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