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김동완
갈릴리를 꿈꾸며 의롭게 세상을 살았던 평화의 선구자 김동완 목사
김동완 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출신의 대표적인 진보 인사로서 활발한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 활동을 펼쳤으며, 이후 희귀 난치병 환자 및 소외계층 지원에 앞장선 인물이다.
1942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김동완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을 재학하던 중, 1970년 11월 일어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자살을 계기로 빈민층과 노동자 인권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70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 선포와 10월 유신, 그리고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반독재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할 필요성을 느꼈다. 김동완 목사를 포함한 한국 기독교계 역시 탄압의 대상이었다. 당시 수많은 한국 기독교 종교인들이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반독재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구실로 비상군법회의를 동원해 180명을 구속기소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세력이 있었다고 발표한 후 73명을 추가적으로 구속하였다. 이때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한국기독교장로회 박형규 목사, 그리고 김동완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구속된 이들을 상대로 고문을 자행해 강제로 자백을 받아냈다. 당시 법원은 독재 정권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기소된 사람들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하였고 이들의 형량 합계는 무려 1650년이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해 모두 3년 내에 석방되었다. 애초에 민청학련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이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반발여론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이후 석방된 김동완 목사는 80년대에 전태일기념사업회 초대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을 맡는 등,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으로써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6월 민주항쟁이 발생해 군부독재 정권이 물러난 뒤에도 김동완 목사는 사회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기독노동자 총연맹 이사장, 청계천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상임대표를 지내고,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최고위과정을 수료하는 등 노동운동에 꾸준히 투신했다. 또한 노동운동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로써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생명의숲 가꾸기 국민운동 공동대표, 동북아 식량포럼 공동대표, 사랑의원자탄운동본부 이사장 등을 지내며 소외계층 지원에 앞장섰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권 운동에 앞장선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인물인 김동완 목사는 2007년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