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유순조
노동투사 유순조
그는 1950년,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군대에 가 계신 중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세 살 때 개울물에 떠내려가 다들 아이가 죽은 줄 알고 변소 한 곁 잿더미에 묻어 두었는데 기적처럼 3일 만에 살아났다. 그 와중에 형이 죽어, 그는 오형제의 장남 역할을 하면서 자랐다. 소작을 부쳐서는 먹고 살기 어려워 아버지는 군 제대 후 인천으로 돈을 벌러 가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에는 가족들이 모두 인천으로 이사했고, 혼자 외할아버지댁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 외할아버지댁과 본가의 큰할머니집을 전전하는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그래서 초등학교도 여주 가남초등학교에서 청양 정산초등학교로 다시 여주 가남초등학교로 옮겨 다녔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말더듬이라고 놀려 싸움을 자주 하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이 있는 인천으로 온 열사는 항도중학교에 진학한다. 가정형편상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가구점에서 기술을 배웠다. 중학교 시절 3년을 일했지만 기술을 배웠다는 이유로 호마이카상 한 개 외엔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열사는 다시는 가구 일을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철공일을 택했다. 군 입대 전까지 합성철공소, 대흥주물 등에 다니면서 오루강 미싱, 라이타 부품과 기계 제작, 자동차 하부 가공 기술, 스테인레스 그릇과 금형 만드는 일, 배의 엔진 만드는 기술 등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 제대할 때는 집안도 1.5평도 안 되는 단칸방에서 방 두칸짜리 전세로 이사를 했다. 열사도 신광정밀, 이천전기, 일신제강 등을 다니며 기슬을 익히고 더 나은 대우도 받게 되었다. 그 즈음 결혼을 하였지만 자녀 출산시기를 두고 부인과 충돌이 생겨 부산으로 혼자 내려가 공업사에서 일하다 친구들의 설득으로 인천으로 다시 와 풍산금속에 입사하였다.
일하면서 테니스와 등산 등 취미 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전환점을 맞게 된다. 회사가 경영상의 이유로 감원을 했는데 자신이 대상이 되었다. 해고수당이라도 받으려고 뛰어다니던 중 명동성당 앞 백병원 내에 있는 노동상담소에서 김말룡 선생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그 이후 집회 등에 참석하면서 박남수를 만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게 되었다. 집회 참석, 역사 학습, 단체 교육 참석 등으로 자신의 의식을 성장시키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가족에 대한 인식도 바꾸게 되어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후 작은 사업장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설립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다른 사업장 취업도 쉽지 않아, 1985년 5월, 자신이 다녔던 이천전기에 다시 입사했다. 소조활동과 현장활동을 통해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던 중,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다. 이천전기에서도 8월 3일 '85년 임금인상과 어용노조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유인물을 뿌렸다. 노사합의에 대한 반발과 노동조합에 대한 불만이 높아 있던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8월 27일 점심시간, 노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순조열사는 정대현과 함께 노조위원장의 비리를 폭로하고 단결을 호소했다. 그 자리에서 임시 대표를 선출했다. 노동자들은 스크럼을 짜고 사내를 행진하며 투쟁의 열기를 높였다. 새로운 파업지도부를 선출했지만 그들의 배신으로 노사협상이 이뤄지고 타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유순조는 9월 25일 해고 된다. 그후 유순조 열사는 자신의 명의로 조합원들에게 성명서와 소식지를 배포하며 복직 투쟁을 전개한다. '88년 3월에는 소식지 제호를 <백만마력>으로 정했다. 이 소식지에는 자신의 복직 문제뿐 아니라 임금인상 요구안 등 조합원들의 이해와 밀접한 사안에 대한 정책을 내고, 다른 노조의 소식까지 실었다. 노동조합 소식지 역할을 한 것이다.
소송에서 이겼으나 복직을 거부하는 사측과 지리한 투쟁을 벌여, 91년에 복직했으나 '93년 초, 노조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해고된다. 사측은 '92년 11월 4일, 두 번째 징계해고를 단행하고 재심 후 아무 이야기 없다가 노조 위원장 피선거권 문제가 불거지자 '93년 1월 4일, 해고를 통보한다. 유순조열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노동조합과 싸우며 130여 조합원의 추천을 받아 출마를 시도했으나 결국 노사 야합으로 위원장 출마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유순조열사의 투쟁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95년 2월, 인천지법에서 승소하였고, '96년 4월, 두 번째 복직을 쟁취하였다.
IMF 금융위기로 이천전기는 퇴출사업장이 되었다. 조합원들은 2년간 ‘일방적인 구조조정 반대 및 생존권 확보 투쟁’을 벌였다. 유순조열사는 그 한 가운데서 투쟁했다. '98년 8월 그는 결국 세 번째 해고된다. 열사는 이 투쟁 중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출소했지만 바로 또 법정 구속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몸을 많이 상하게 되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사이 자신의 몸에 병마가 스민 것이다. 결국 대장암으로 2003년 3월 8일, 생을 마감했다. 유순조열사는 불굴의 의지, 타협하지 않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보여주었기에 남은 자들의 투쟁을 기대하며 우리 곁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
출처
http://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291300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