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정유미
들꽃같은 혁명가 정유미
정유미 열사는 1962년 전라도 함평에서 태어나 1976년에 시카고로 이민을 갔다. 1980년, 미국에서 일리노이 주립대 회계학을 전공하던 열사는 5.18 민주화항쟁의 소식을 들은것을 계기로 그 후 한 평생동안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했다.
시카고 인근 지역에서 한인 대학생과 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조직인 석암회원 활동을 거쳐 1989년에는 재미한국청년연합에서 활동하였고, 1990년에는 시카고 청년교육문화원 원장을 맡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다음 해인 1991년, 흑인 청소년 교육 자립센터 이사를 역임하는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활동 역시 펼쳤던 정유미 열사는 한인동포 사회를 위해 국제연대사업을 도맡았다.
정유미 열사의 열렬하고 헌신적인 활동을 발판으로 한반도 내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전쟁범죄를 진상규명하는 단체인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가 조직되어 공동사무국 초대 사무부총장과 2대 사무총장을 지냈다.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과 같은 주권 침해적인 행각을 밝혔으며, 매향리 사격장 문제,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발생한 전쟁범죄 등을 밝히기 위해 국제공동조사단을 결성해 제네바 유엔인권위에 참가하고 미국전범재판을 치루는 등의 활약을 하며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이 덕에 역사상 처음으로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한 한미 양국 합동조사가 이루어지는 성과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반도 평화원정대의 브뤼셀 원정투쟁', '한미FTA 저지 워싱턴 원정집회' 등 한국 진보진영의 국제적 투쟁에 필요한 실무를 도맡아 진행하는 등 수많은 노력을 했다. 전도유망한 공인회계사로 살며 안정적이고 유복하게 살수 있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평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바친 것이었다.
2006년, 615 민족통일대축전 대표단으로 광주행사에 참가했으나 지인들이 건강검진을 권고할 정도로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정유미 열사는 위암 말기를 진단받아 대한민국에서 기나긴 투병생활을 시작하였으나, 2년 뒤인 2008년 7월 26일, 46세의 나이로 남양주 에덴요양병원에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