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정태수
장애해방운동가 정태수
정태수 열사는 1967년 겨울 제주도 모슬포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열사는 생후 10개월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어린 나이부터 목발을 짚게 되었다.
1988년 3월, 정태수 열사는 서울 고덕동에 있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 입학했다. 열사는 장애인들이 온갖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사는 것은 물론이고 취업조차 되지 않는 현실 속에 살았는데, 이에 대해선 장애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임으로 사회가 변혁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1년 후 정태수 열사들과 열사의 친구들은 복지관에서 졸업하였으나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 당시엔 장애인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정태수 열사는 복지관 동문인 친구들과 함께 동문회 '싹틈'의 집행부가 되어, 친목모임에 불과했던 싹틈동문회를 장애인 운동을 위한 단체로 탈바꿈했다.
열사와 친구들은 복지관 졸업생들의 취업 실태에 대해 조사했고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복지관 측에서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받기 위해 취업률이 90퍼센트가 넘는다고 홍보하던것과 다르게, 실제로는 90%가 실업 상태에 놓여있었다. 싹틈동문회 측에서는 이에 대해 소식지를 만들어 전파하려 했으나, 복지관 측에서 소식지를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탓에 싹틈 측에서는 복지관의 사과와 취업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점거농성을 개시했다.
정태수 열사는 자기 인생 최초의 점거투쟁이라며 삭발을 해 나왔고, 서울시장과 함께 협의에 나섰으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했다. 이후 정태수 열사는 재수학원에 다니던 도중에도 한국소아마비협회가 운영하던 '정립회관'에 비리가 발생하자 45일간의 점거 농성에 함께하기도 했다. 장애인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이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던간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고, 1991년에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활동가가 되어 본격적으로 장애인 운동에 투신하였다.
노동시장에 들어갈 수 없는 장애인들이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고 노점상을 차렸으나 공권력과 용역 1,500명을 동원해 강제철거를 진행해 최정환 열사가 분신투쟁을 하고 이덕인 열사가 의문사하는 현장을 겪기도 했다. 노점상 사건 때문에 인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한 정태수 열사는 이덕인 열사의 사인을 어떻게든 조작하기 위해 경찰을 대규모 투입하여 시신을 탈취해 장기를 모두 제거하고 겉만 꿰매서 돌려주는 행태를 보고 그 날 국가권력의 폭력을 실감했고, 그렇기에 더더욱 투쟁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결심을 하였다.
열사는 밤새 차를 몰고 무전기처럼 커다란 핸드폰으로 몇 시간씩 통화하며 사람들을 만나 장애인 걷기운동을 주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되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장애인 운동을 내려놓고 생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창업비용 빚을 갚아가고 매우 바쁜 맞벌이 생활을 했던 열사였으나 장애인 운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던 나머지, 열사는 운동 현장에 복귀하여 장애인청년학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열사는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을 주도하고, 서울장애인연맹 조직국장과 사무처장을 맡아 누적되는 피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헌신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돌볼 여유도 가지지 않은 채 활동하느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로가 쌓인 바람에 정태수 열사는 2002년 3월 3일, 44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태수열사 추모사업회 ::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 (taesoo.or.kr)
정태수열사 추모사업회 홈페이지 입니다
::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 (taeso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