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제종철
민중의 벗 제종철
제종철 열사는 1968년 11월 20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입학한 열사는 선배들과 동기들을 따라 일찍이 자주 민주통일을 위해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89년, 총학생회 기획부장을 맡을 정도로 학생운동에 열렬히 참가했던 열사는 졸업 후 경기 북부 지역에서 노동단체를 결성해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93년에는 경기인천지역대학 총학생회 연합 연대사업위원장을 맡고, 1994년에는 한국대학 총학생회 연합 연대사업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1년에는 저소득 실직가정 어린이들을 위해 방과후 무료교실인 느티나무 운영위원으로서 봉사했다.
2002년, 제종철 열사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 양주군에서 주한미군이 조종하던 장갑차에 의해 두 여중생 신효순과 심미선 양이 깔려 숨진 것이었다. 당시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사고 발생 다음날 치러진 경기에 모두 관심이 쏠려있던데다 해당 경기에서 한국이 승리하여 월드컵의 열기에 관심이 아예 묻혀버렸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은 결국 고의적인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 사고라는 수사결과가 나와 가해자 측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간 주한미군의 범죄는 6.25전쟁 이후로 계속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왔으나 대부분의 범죄가 불기소 처리되는 등 제대로 된 정의구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배경과 함께 수많은 국민들이 한미관계가 한국 측에게 불평등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상태에서 아무리 과실치사 사고라 하더라도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너무하다는 여론이 빗발치게 되었다.
의정부 청년회 창립멤버로 활동하던 제종철 열사 또한 의정부여고 학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촛불집회에 나섰다. 이후 2003년부터 건설노동자 및 저소득층 자녀 탁아방 교사를 맡고, 민주노총 금속노조 교섭위원, 경기북부지역 일반노조 부위원장 등을 맡았던 열사는 2003년 11월 20일, 사고를 냈던 인원들이 소속된 미군 2사단 캠프 레드클라우드 앞에서 미군 무죄판결 1주년 촛불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다 철길에서 운명하였다.
경찰은 제종철 열사가 철길에 누워있다 달려오던 열차에 치였다며 자살 또는 사고사로 결론지었으나, 당시 열사가 철로에 누울 정도로 만취한 상태가 아니었으며, 사체가 심하게 훼손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점, 자살의 징후 없이 사고 30분 전에도 부인과 통화하여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던 점 등을 미루어 아직도 열사의 죽음에 의문점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