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조용술
통일을 꿈꿨던 목회자, 조용술 열사
조용술 목사는 1920년 12월 1일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익산에서 부유하게 살아왔으나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진주만 공습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대적인 징병이 개시되는 바람에 조용술 목사는 해군 군속으로 뽑혀 웨이크 섬으로 보내졌다. 그 치열한 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생존률이 제일 극악에 달했던 일본군의 편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2년간의 세월을 보낸 조용술 목사는 이때 목사가 되어 사회운동에 이바지하겠다 결심하였다.
이후 조용술 목사는 빈민을 위해 급식소를 차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군산 지역에서 시무하였다. 조용술 목사는 평생을 복음교회 목사로 살며, 1973년에 총무를 시작했고 이후 9년간을 복음교회 총회장으로 지냈다. 기독교 대한복음회 총회장을 지내고, KNCC라고도 불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을 지내는 등 기독교계의 전설적인 원로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제도권 인사같은 인물이었다.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었고, 박정희가 일본군에 자원입대하여 적극 부역한 일화와 함께 여순반란때 공산당 활동을 하다 검거된 후 동료를 팔아먹은 이야기를 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평소에도 민주운동의 신념을 가지고 있던 조용술 목사는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본격적인 통일운동가의 행적을 보였다.
1990년, 베를린 범민족연합 남북해외 실무회담 개최 2달 전 조용술 목사는 회담 대표가 되어주라는 제안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뜻밖의 요청이었으나 조용술 목사는 망설임 없이 이에 응했으며, 복음교회 총회장도 사퇴해 조국의 통일을 위해 출국에 나섰다. 그리하여 1990년 11월, 베를린 3자회담에 나가 남한 측 3인 대표단 중 한 명을 맡았던 조용술 목사는 귀국하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조용술 목사는 재판을 받았으나 오히려 통일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단있게 설명하여 재판장의 분위기를 휘어잡고 방청객을 감동시켰다.
조용술 목사는 결국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출소하였고, 이후에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1991년에는 전민련 고문과 전국연합 상임고문을 맡고, 1992년에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을, 1994년부터는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1998년부터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회의 상임고문, 2004년에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상임고문을 맡는 등 주요 사회단체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활약했다.
조용술 목사는 췌장에 담석이 생겨 큰 수술을 했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결국 폐와 간에 합병증이 발생하여 2004년 11월 15일 85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