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한명규
참 세상 자유 위하여 노동운동에 온 모을 불사른 한명규
고한명규는 엄혹한 80년대 군사독재 시기에 집회, 시위용품 개발. 생산하여 민주노총, 민통련등에 현수막등 쟁의용품을 공급한 독보적 존재였고, 2005년 사망하기까지 열정적으로 즐겁고 치열하게 노래, 상황극등으로 투쟁대오를 꾸려온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서 좋은 친구로 기억되는 동지다.
서울 중동고등학교 졸업.
군대는 최전방 철원, 군에서 대자보등 글솜씨를 보임,
제대 후 배추장사, 수박, 사과장사등을 하다가 누나의 권유로 글씨학원 다님.
간판회사 취업 3개월만에 필적이 좋아 3년 경력자와 같은 월급 받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1983년 콘트롤데이타노동조합 위원장으로 해고되었던 한명희(누나) 소개로 영등포산업선교 노동교회를 다니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함.
혼자 배운 기타로 당시 노동자집회가 열릴때면 모든 노동가요를 신나게 연주하며 분위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했고, 그가 부르는 ‘노동의 새벽’은 눈물바다를 이루곤 했다.
고한명규는 산선의 예배 및 집회에서 문화행사로 정치풍자극, 노동자예수등 마당극과 노래극등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거의 주인공으로 활약하였고, 현장 노동자 지원과 거리집회 참여로 경찰에 수차례 연행되는등 때론 구타와 모욕을 겪었지만 늘 즐겁고 신나게 투쟁하였고 늘 친구들에게 인기있는 친구요 든든한 동지였다.
1984년경부터 1988년까지는 정치적으로 집회나 행사를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주로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매주 노동자집회와 행사가 빈번했는데, 그는 노래와 연극, 풍물연주뿐 아니라 대자보 글쓰기, 현수막 만드는 일도 도맡아 하였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일은 무보수 자원봉사를 10년 이상 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당시에는 컴퓨터 글씨가 개발되기 전, 그는 손글씨로 힘찬 글씨체와 함찬 주먹 그림을 표현하였다. 특히 ‘선봉대의 긴 머리띠’ 개발자이고, 조끼, 장갑등 집회 분위기를 멋지게 가꾸는 열정도 뜨거웠다.
당시 전국적으로 민주노동운동 진영은 물론 민청련, 민통련등 거의 모든 진보운동단체에게 현수막을 공급하였다, 군사독재 시기에 현수막과 시위, 집회용품을 자유롭게 만들고 거래할 수 없었던 시기였으나 그는 그러한 분위기를 두려움없이 이겨내며 일하였다. 1990년 전노협 창립 때 삼엄한 경찰 감시를 뚫고 대형걸개 그림현수막을 온몸에 감고 현장에 걸었던 일, 그 후 해마다 1995년 민주노총 창립부터는 민주노총 11월 노동자대회 대형걸개 현수막을 그가 죽기 2005년 이전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온몸으로 만들고, 걸고 그 현장에 참여하여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던 여의도 광장에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그가 떠난지 18년인데 그가 쓴 ‘단결 투쟁’ 글씨를 노동현장에서 보게되고, 그가 남긴 주먹 그림이 아직도 거리 현수막에서 발견되곤 한다.
그는 1988년 김건옥 동지와 결혼 후 둘이서 함께 쟁의용품 생산으로 날밤을 새웠으며, 이 일이 너무 좋아 딸들에게 물려주겠노라 말하곤 하였다.
고한명규는 2005년 1월 25일 47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누군가 고한명규동지가 떠난지 십여년만에 그를 열사로 등록해 주셨다, 그가 외친 노동해방과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기억하고 도와주신 그분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