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권중희
권중희 선생은 백범 김구 주석의 암살 사건 배후를 약 50년 동안 추적해온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이다.
청년 시절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은 뒤 김구 암살 사건의 범인으로 판명난 안두희에 대한 처벌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정부에 탄원을 해 왔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82년부터는 직접 추적으로 방향을 바꾸고 1987년 백주대로에서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응징하였다.
이에 구속, 출소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백범 암살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을 진행하였다.
1992년 4월 선생은 김석용과 함께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하여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냈다. 1992년 11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 소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 국회조사보고서』를 1995년 12월에 작성하게 하였다. 1993년에는 자서전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집필하고 2004년에는 미국 정보당국의 백범 암살 배후 근거를 찾기 위해 출국하기도 하였다. 출국 후 2월 1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조사를 시작하였지만 주요 내용이 파기되어 귀국, 그해 7월 민족정기구현회를 설립하였다.
2004년부터는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고문,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고문 등 통일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으며, 2007년 11월 16일 자택에서 집필 중 운명하였다. 권중희 선생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 청산을 통해 민족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더욱 확대되었다.
- 김구암살사건에 대한 설명
정의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한 사건.
내용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는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안두희도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국회의 보고서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관련 조사와 연구를 종합해 보면, 먼저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
- 안두희에 대한 설명
정의
해방 이후 현역 육군 소위로 김구를 암살한 군인.암살자.
개설
평안북도 용천 출생. 신의주 부호였던 병서(秉瑞)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안산 김씨이다. 해방 후 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현역 육군 소위로 1949년 김구를 살해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의주와 신의주의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다. 1939년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휘성 회남(淮南), 강소성 서주(徐州) 등을 전전했으며, 회남에서는 일본군 관리기관인 군납품판매조합의 이사로 일했고, 서주에서는 요식업을 했다. 1945년 1월 귀국해서 용암포 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1947년신의주에서 월남한 뒤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에 가입해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이었다. 1948년 11월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1949년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金學奎)의 추천으로 한독당원이 되었는데 이는 김구(金九)를 죽이기 위한 의도적인 포석이었으며, 당내 내분으로 조작해 배후를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현역 육군 포병소위로서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의 저택인 경교장(京橋莊)에서 4발의 총탄으로 김구를 살해하였다.
1949년 8월 5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에서 종신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같은 해 11월 국방장관신성모(申性模)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의 상신을 받아들여 징역15년으로 감형되었다. 서울육군 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6월 27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7월 10일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의 특별명령 4호로 육군 소위에 원대 복귀하였다. 9월에 중위로 진급하였고, 1952년 2월 15일 신성모의 명령으로 형이 면제되었으며,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1군사령부 관내 전사단에 공급하는 군납 식료품 공장인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창업하여 경영하였다. 그는 중형을 면한데다가 1년 여밖에 복역하지 않았으며, 석방 후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부 하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그의 범행을 은닉시켜주거나 방임시킨 측면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인 6월 26일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개월 여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 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으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56년 10월 안두희에게 폭행 당한 양구경찰서 순경 길종하는 진상규명위원회의 권유로 안두희를 고소했으며, 결국 1962년 1월 25일 특수 폭행 치상죄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1965년 12월 곽태영이 안두희를 테러했으며, 1966년 김지웅 자신이 김구 암살의 총책임자라고 일본에서 폭로하는 등 진상규명의 분위기가 일자 안두희는 미국 이민을 시도하였다.
1971년 서북청년회 회원이자 한독당원으로 안두희와 김구 살해를 공모한 홍종만이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1992년 4월 권중희(權重熙)와 김석용이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 1992년 11월 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위원장 姜信玉 의원)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1995년 12월에 작성하였다.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시민 박기서(당시 46세, 경기도 부천소신여객 버스 운전사)에게 1996년 10월 23일 피살되었다.
평가
안두희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김지웅은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하였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김구 암살에는 당시 장은산(張恩山) 포병사령관과 김창룡(金昌龍) 육군정보국 방첩대장,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부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재판장,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직접적인 지령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는 개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암살 사건에서 최고위층의 개입을 구체적인 물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승만에게는 도덕적 책임과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안두희(安斗熙))]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내행동은 애국이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배후는 누구인가?
https://youtu.be/jKLO5Tf6bN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