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김충희
김충희 열사는 1956년 출생의 민주화운동가이다.
김충희 열사는 1975년 성균관대학교 약학대에 입학하여 재학 중 언어문화연구회와 여학생운동 활동에 참여하였다.
여학생운동을 지도하게 된 김충희 열사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출소한 김충희 열사는 1982년 민주화운동가인 김희상과 결혼하였고, 민청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약칭 민청련은 1983년 9월 민족통일과 부정부패특권정치의 청산, 냉전체제 해소 등을 목표로 하여 설립된 민중운동단체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운동을 강경탄압, 민주화 운동권은 수차례 실패를 겪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학원가의 반정부시위들은 계속되고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구속학생 석방, 제적학생의 복학조치와 같은 유화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로 인해 1970년대 말 활동했던 ‘민주청년인권협의회’를 비롯한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학원가로 복귀하게 되며 침체되어 있던 민주화 운동이 다시금 활기를 띄게 된다.
이들은 공개적인 청년단체가 필요함을 느꼈고, 1983년 9월 30일 뱀에게 잡아 먹혀도 뱀을 죽여 살아남는 두꺼비를 조직의 상징물로 내세우며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였다.
1985년 5월 민청련을 비롯한 여러 민주화 운동 단체에서 ‘광주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자, 앞선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거뒀던 전두환 정권은 여러 민주화 단체와 함께 이들의 구심점인 민청련에 대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한다.
1985년 9월 김근태를 비롯한 여러 관련자들이 구속, 투옥되었고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조작하려 시도하며, 그 과정에서 심한 고문도 자행되었다.
이때 김충희 열사의 남편인 김희상 역시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이에 김충희 열사는 1985년 민주화 운동 관련 구속자 및 양심수를 후원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인 민가협에 가입해 활동했다.
김충희 열사는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홍천군 두촌면으로 귀촌하여 약국을 운영하며 주민자치활동을 전개했다.
김충희 열사는 2016년 9월 30일 암 투병 중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