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박정기
열사들의 아버지 박정기
1928년 부산 정관면 월평리에서 태어난 박정기 선생은 부산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며 1956년 정차순 여사와 결혼해 살았다. 박정기 선생은 막내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고 1986년 정년 퇴임 후 목욕탕집 주인을 하며 평범하게 살 예정이었다.
그러나 1987년 1월, 박정기 선생의 인생을 뒤바꾸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서울대학교에 간 막내 아들인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만 22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박정기 선생의 아들을 살해하고선 언론에서 책상을 탁 하고 쳤다가 본의 아니게 쇼크사를 유발해 박종철 열사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박정기 선생은 사망한 아들 박종철의 사망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하며 부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참여하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는것을 시작하였다.
1988년부터 유가협에 참여하여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한 뒤 박정기 선생은 명지대학교의 강경대 학생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다 항의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불교인권상을 수상하고 고문피해자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 대표직을 역임한 박정기 선생은 1994년 제5차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장 직을 역임해 통일운동에서 헌신했다. 박정기 선생은 김대중 정부 시기 422일에 걸쳐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과 민주화운동명예회복특별법 제정 농성에 참여해 끝내 두 개의 특별법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다 사망하여 6월 민주항쟁의 불꽃이 된 아들 박종철의 뜻을 이어 노년기 전체를 민주화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박정기 선생은 척추골절 수술 이후 건강이 악화된 것을 계기로 2018년 향년 90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