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2010년대 이후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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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백기완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백기완 선생은 1945년 해방 이후 13세의 나이로 서울로 내려왔다. 한국이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본 미국과 소련 등지의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는 분단을 겪게 되었고, 백기완 선생은 이 탓에 이산가족이 되며 이후 통일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한민족의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백기완 선생은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6.25 전쟁에 직접 참여해 전쟁의 참화와 민족적 비극을 겪었다. 이후 1950년대엔 야학을 열어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 활동을 하던 백기완 선생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4.19 혁명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4.19 혁명을 통해 얻은 민주화의 희망이 박정희 소장의 군사반란으로 인해 사라졌고, 백기완 선생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여러 부조리에 항거하였다.

 

1964년에는 함석헌 열사와 장준하 열사 등과 함께 한일회담에 반대하다 구속되기도 하고, 1973년 유신독재에 맞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긴급조치 1호 첫번째 위반자로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39년만에 최종 무죄를 판결받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백기완 선생은 민주정권의 쟁취를 위해 힘썼으며, 1980년에는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군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병감정 유치로 풀려나 병원에 입원되는 탄압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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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은 1986년엔 명동성당에서 이른바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이듬해 6월 항쟁에서 시민대표로 연설했다. 1987년과 1992년엔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해 민주정권 쟁취와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힘썼다. 이후에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밀양 송전탑 건설, 한미 FTA 저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박근혜 탄핵 시위,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등 사회 이슈에 관심을 놓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2020년 1월부터 폐렴 증상을 앓고 입원생활을 시작한 백기완 선생은 2021년 2월 15일 한 평생을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바치고 88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출처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10215101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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