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유원호
유원호 선생은 1930년 7월 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광복 이후 한국이 분단되자 홀로 월남하였다.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가 있던 유원호 선생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참전하였다.
1956년까지, 광주 보병학교 상무대에서 근무했던 것을 계기로 1960년 광주시의원 선거에 나섰다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듬해 목포 출신의 부인 안순심씨와 결혼한 유원호 선생은 조선대학교 법학과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년, 광주 지역구 신민당 의원인 김녹영의 비서관을 지냈던 유원호 선생은 이후 사업을 하다 1985년 국회부의장이 된 김 의원의 비서실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정계 복귀가 아닌 위암이 발병한 김 의원의 부탁을 들어줘 일본에서 두 달간 직접 간병을 했다. 여러 경력을 인정받아 1988년에는 주식회사 중원 엔지니어링에서 대표이사 직을 맡았던 유원호 선생은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정 앞에 서게 되었다.
문익환 목사와 정경모 선생, 그리고 황석영 작가와 함께 방북하여 4.2 공동성명을 통해 평화통일을 위한 길을 제시하였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문익환 목사와 유원호 선생은 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연행되었다. 공안당국은 유 선생을 북한 공작원이자 방북을 주선했다고 몰아가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언도하였으나 실제 재판 과정에서 북한의 지령이나 자금을 받은 사실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원래 방북에 합류할 대상도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4년간의 수감 끝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유원호 선생은 이후 통일맞이칠천만겨레모임 이사직과 사단법인 한글문화연구회 이사를 맡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유원호 선생은 2019년 10월 27일 89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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