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이애주
시대의춤꾼 이애주
1947년 10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난 이애주 선생은 다섯 살 때부터 춤을 추었다.
어린 시절부터 춤에 소질이 보였던 이애주 선생은 고등학교 3학년 무용협회 콩쿠르에서 창조적 즉흥성을 발휘해 만장일치로 특상을 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사실 이애주 선생은 대학원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교수직을 내정받았다.
20대의 어린 나이부터 편안한 미래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민족의 혼이 담긴 춤을 공부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인생 목표로 삼았던 이애주 선생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거부했다.
그렇게 이애주 선생은 서울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난 뒤 1969년, 자신의 목표대로 한영숙 선생에게서 승무를 사사받게 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정통 승무가인 한영숙 선생에게서 승무를 사사받은 이애주 선생은 단순히 춤 잘 추던 학생 취급을 받던 인생에서 탈피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연결된 민족적 예술을 펼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애주 선생가 그토록 한민족의 정통 춤사위에 인생과 열정을 바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애주 선생에게 있어 정통춤이란 한국인의 문화적 본질을 상징이었으며 이를 알아가는 과정은 선생 본인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기나긴 일제 강점기를 거친 후 서구 기독교 문화가 유입된 탓에 한민족 고유의 문화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던 실정이었다.
일례로 197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도입된 무용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했으며 춤, 마당, 판이라는 우리말이 아예 쓰이지 않았다.
이에 민족 문화를 되살려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이애주 선생은 1974년 개최한 자신의 공연에서 무용이라는 단어 대신 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본 여론은 오히려 등을 돌렸다.
서울대학교를 나온 지식인이 어떻게 춤이라는 무식하고 상스러운 단어를 사용하냐며 이애주 선생를 비난하는 의견이 쇄도했으며 심지어 불온용어를 사용한다며 국립극장에 블랙리스트로 등재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애주 선생은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식민 용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여러 순우리말 용어들이 일제시대 용어를 대체하여 거리낌 없이 사용된다는 것만으로도 이애주 선생의 노력은 우리나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이애주 선생은 70년대 초부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춤사위를 보여주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본래 한국의 전통춤이란 극소수를 제외하면 전부 피지배 계층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민중의 몸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애주 선생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시름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민중을 위한 전통춤 활동을 시작하였다.
민주화 과정의 현장에 있던 이애주 선생은 각종 집회에 등장해 춤사위를 벌였고 각 대학의 축제에서 초청받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민주화 세력에게서 명성을 얻었다.
1987년 1월, 전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권이 가한 물고문으로 인해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것이었다.
뒤이어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고 이는 6월 민주항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국민들의 감정은 폭발했고, 이는 곧 시국에 대한 발언으로 이어졌다. 말 할줄 아는 사람은 말로, 그림 하는 사람은 그림으로, 문학 하는 사람은 글을 통해 발언했다.
이애주 선생 역시 자신이 제일 잘 하는 춤을 통해 발언하기로 결심했다.
6월 27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이애주 선생은 진혼굿 춤판을 열었다.
춤판이 끝난 직후 전국적으로 민주화 대행진이 발생했고, 그 다음 날 이애주 선생의 춤은 수많은 언론에 게재되어 서울대학교의 이애주 교수가 민주화 대행진의 불길을 당겼다는 평을 받았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날에도 이애주 선생은 한을 풀어주기 위해 한풀이춤을 펼쳤다.
이는 뜻하지 않게 전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자연스럽게 현장과 연결된 이애주 선생은 전국 각 지역을 다니며 온갖 선생들과 부당하게 죽은 이들을 위한 한풀이춤을 추게 되었다.
1988년 이후 이애주 선생은 민중 개혁 춤을 중단하였으나, 제주 4.3 사건 희생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그리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추모하는 춤을 추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애주 선생은 1996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너무나도 부족해 전통춤을 이어나가기엔 너무나 열악한 상황에 놓였다.
이애주 선생은 정치에 입문하라는 권유를 거절했고 평생 기득권과 타협하지 않은 채로 올곧게 살아왔으나 극장을 마련할 만한 후원 하나조차 없었다.
2013년, 이애주 선생은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하였다.
이애주 선생은 한국전통춤회 예술감독, 한영숙춤보존회 회장 등을 지낸 뒤 2019년 경기문화의전당 이사장에 이어 2020년부터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맡아왔다.
국민훈장 목련장, 만해대상 예술부문 수상, 옥조근정훈장 대통령상, 박헌봉 국악상, 대한민국 전통춤 4대명무 한영숙상 등의 빛나는 경력을 가지고 있던 이애주 선생은 암 투병 끝에 2021년 5월 10일 영면하였다.
영원한 안식처 앞에서 생전의 목소리, 따뜻한 미소, 언니 같이 살갑게 대해 주신 기억들이 아로아롱 되새겨지네요.
영가무도를 가르쳐 주시며 함께 했던 수련도 제게는 최고의 추억입니다.
전통을 일상처럼 맥을 잇는 열정을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작은 것 하나 소홀함 없이 최선을 다 하는 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즐기소서.
그리고
우리의 얼을 찾고 우리 것을 지키고 계승하는 소명을
잊지 않도록 저승에서 빌어 주소서.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빌어주소서.
보고 싶습니다. 회장님의 춤사위, 발뒤꿈에서 느껴지는 우주를 다시 보고 싶고 느껴 보고 싶네요.
그립습니다
가슴이 저미도록 그립네요.